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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우리 문화<8> 화순 김삿갓 공원]동복 곳곳에 서린 방랑시인의 그리움과 회한의 눈물
죽립 쓴 동상서 충효의 어떤 길도 갈 수 없었던 복잡한 심사 읽혀
공원 표지석 문구 ‘회향자탄’…고향 그리워하며 스스로 탄식한다
화순 동복서 말년의 삶…구암리 정시룡 사랑채서 방랑의 삶 마감
2022년 04월 25일(월) 01:00
화순군 동복면 ‘김삿갓 공원’은 방랑시인 김삿갓의 문학과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광주일보 자료>
석양에 사립문 두드리며 멋쩍게 서 있는데

집 주인이 세 번씩이나 손 내저어 물리치네

저 두견새도 야박한 풍속을 알았는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숲속에서 울며 배웅하네.”

위 시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야박한 풍속’이라는 시다. 일평생 방랑의 삶을 살았던 시인 김삿갓. 한마디로 그는 자유로운 노마드(유목민)였다. 화순 동복 일대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김삿갓은 상상 속 인물이 아니라 현존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동복(同福)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옮긴다. 이곳에는 스스로를 단죄하는 생을 살아야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흔적이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모후산 어딘가에서 바랑 하나 짊어지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그가 나타날 것 같다. 동복의 속살로 들어갈수록 푸르고 단아한 남도의 풍광이 펼쳐진다. 소담한 능선 너머로 봄 풍경 완연한 남도의 모습이 펼쳐진다.

동복에 들어서면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자는 둥지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는 성경의 구절이 생각난다. 동복호가 건설되면서 정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심사와 말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삿갓시인 김병연(1807~1863)의 회한이 겹쳐지기 때문인지 모른다.

김삿갓은 1807년(순조 7년)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난고(蘭皐)다. 난초가 우거진 언덕이라는 뜻으로, 호에는 이미 녹록지 않은 삶이 드리워져 있다. 그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조선 후기 권문세가 안동 김씨 가문의 자손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 집안의 자제였으니 입신양명은 따논 당상이나 진배없을 터.

사람들은 ‘삿갓 립(笠)’ 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불렀지만, 김삿갓으로 불리어야 온전히 그가 된다. 여기서 삿갓은 머리를 덮는 사물의 의미와 허허로운 방랑을 일삼는다는 두 의미가 함의돼 있다. 그러므로 삿갓은 그의 명확한 존재 근거가 되는 기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추한 것을 덜 보기 위한 소소한 방편이자, 부끄러운 자아를 가리기 위한 방책이었을 게다. 당대나 지금이나 몰염치한 세상을 향한 나름의 항변이었을 수도 있겠다.

김삿갓이 마지막 숨을 거둔 정시룡 가옥.


김삿갓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삶은 정해진 규범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인데 그의 일생이 그러하였다. 열네 살 때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버린 사건과 조우한다. 때는 1811년(순조 11년) . 평안도에서 홍경래 사건이 일어난다.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중에 김익순은 역모까지 가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문헌으로나, 정황으로나 그는 당시 포로로 잡혔던 듯싶다. 이 일로 난이 수습되고 김익순은 참형에 처해진다.

멸문지화라는 태풍이 그렇게 몰아쳤다. 김병연의 아버지는 식솔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얼마 후 부친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김병연은 어머니와 함께 강원도 영월로 숨어든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정자 ‘망미대’.
김삿갓에게 유년은 그렇게 부초와 같은 시기였다. 길 위의 삶을 살았으며 길 위에서 생을 알아나갔다. 그에게 길은 거처이자 본향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명문가 자제답게 그는 시재가 특출했다. 내면에 출사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으리라. 마침내 스무 살 되던 해 ‘역적 김익순의 죄를 통탄하는 글’로 장원을 한다. ‘망군(亡君) 망친(亡親)의 벌로 만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탄핵의 내용은 충이 국시인 조선에서는 보편타당한 주제였다.

어린 김병연은 멸족의 화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기에 조부의 존재에 대해 소상히 알지 못했다. 후일 어머니로부터 “네가 만고의 역적으로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방어사가 네 할아버지셨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폐족의 후손이라는 모멸보다 조부를 욕되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손을 자르고 싶었을 것이다. 시대가 낳은 불의한 ‘연좌제’에 그렇게 자신이 옭아들 게 됐다. 그는 방랑의 길을 나섰다. 삿갓을 쓰고 죽장을 들고 불의한 시대를 떠도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었다.

회향자탄(懷鄕自歎). 구암리 김삿갓공원 표지석에 쓰인 문구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탄식한다는 의미는 가없다. 충효의 어떤 길도 갈 수 없었던 복잡한 심사가 읽혀진다. 대나무지팡이를 들고 부채를 든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새와 짐승들도 제 집이 있는데/ 나의 한평생 돌이켜보니 슬프네/ 짚신에 대지팡이로 떠도는 천리길/ 흐르는 물 뜬구름처럼 사방이 내집이네/ 남을 탓함도 옳지 않고 하늘도 원망키 어려우니/ 세모의 슬픈 감회 창자가 끊기려 하네” (‘평생시’ 중에서)

김삿갓은 화순을 소재삼아 시를 많이 지었다. 사진은 물염적벽
김삿갓에게 동복 일대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청정의 산세와 지순한 풍취에서 고향의 안락을 느꼈다. 그에게 방랑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패륜을 지우는 고결한 자해였다.

구암리 정시룡의 사랑채는 김삿갓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다. 이름하여 김삿갓 종명지(終命地)다. 정시룡은 김삿갓에게 사랑채를 내어주고 말년에 기거하도록 했다. 1863년 3월 29일 마침내 김삿갓은 이곳에서 낭인의 삶을 마감한다. 그리고 동편 동뫼에 초장되었다가, 후일 아들에 의해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로 이장된다.

생전의 김삿갓은 적벽의 풍광을 좋아했다고 한다. 화순은 적벽의 고장이다. 동복천 상류에 노루목적벽, 몰염적벽, 이서적벽 등 수려한 적벽이 많다. 그만큼 풍광이 수려하다. 적벽은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를 왔던 최산두가 이곳의 풍경이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여졌다.

김삿갓은 적벽에 배를 띄우고 시 한수 짓고 싶었을 거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던 그도 이곳이 영혼의 거처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인생은 다만 광야와 같은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음을 말이다. 감삿갓은 가고 없지만 주옥같은 시(詩)만 남았다. 종명지들 둘러보다 문득문득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는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