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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절한 선율 타고 흐르는 남자들의 사랑과 이별
<14>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바흐 ‘카프리치오 BWV992’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각색·연출
동성애·인간 성장기 그린 수작
주연 티모시 살라메 연기 눈길

10살 때 부모 잃은 바흐
어머니 역할했던 둘째 형
군대 보내는 슬픈 마음 담아 작곡
2021년 11월 29일(월) 01:00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올리버, 올리버, 올리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가장 에로틱하게 느낀 문장의 대사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그의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단지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뿐인데 나는 왜 이 문장이 그토록 강렬하게 느껴졌을까….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가고 극장의 불이 켜진 후 한참이 지나도록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엘리오가 벽난로 앞에서 계속 올리버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17살의 이탈리아 청년 엘리오와 24살의 젊은 미국 남자 올리버다. 올리버는 여름 동안 고고학계의 석학인 엘리오의 아버지를 도우러 온 연구 보조원이다. ‘나중에’라는 단어를 버릇처럼 되뇌고, 낮에는 책을 보는 것 같다가도 밤이 되면 시내에 나가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는 외향적인 남자다. 엘리오는 자신과 정반대의 취향을 가진 올리버를 오만하고 불손해 보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행동과 말투에 모든 촉수를 세우고 있다. 올리버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어쩌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던 거라고 돌이켜 보기도 한다. 소년은 이 모든 상황이 혼미스럽다. 머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자석처럼 올리버에게 끌리고 있었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한 장면.
동성애를 소재로 하면서도 한 인간의 성장기를 다룬 깊이 있는 영화이며, 부모가 자식을 이해하는 방법, 자식이 부모를 친구처럼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준 감동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이탈리아 출신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작품으로, 장면과 대사 하나하나 어색하고 과한 부분이 없게 느껴졌다. 이집트 출생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인 작가 안드레 애치먼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원작으로, 원작자 애치먼은 람다 문학상 게이 소설 부문을 수상했고, 각색자이자 감독인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로 2018년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했다.

주인공 엘리오를 연기했던 티모시 살라메는 오묘한 분위기의 눈빛, 작은 얼굴, 곱슬거리는 머리, 가느다란 몸짓으로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전형적인 이탈리아 풍광이 그려지는 엘리오의 집이나 피아노, 기타, 책, 산책, 수영 등의 소재가 영화를 한층 클래식하게 느끼게 한다. 영화에서 흐르는 음악은 바흐에서부터 라벨, 뉴에이지까지 다양한데, 이번 글에서는 올리버와 편곡에 대해 티격태격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장면에 흐른 바흐의 곡을 소개한다. 바흐가 멀리 떠나는 형을 생각하며 작곡한 ‘카프리치오 BWV 992’다.

엘리오는 바흐의 멜로디를 리스트, 부조니 버전으로 바꿔 연주하다 마지막엔 엘리오 식으로 길게 연주한다. 원곡을 그대로 연주하지 않고 그 안에 엘리오의 마음을 담아 연주한 편곡을 들은 올리버는 화를 낸다. 편곡이 아닌 원곡을 계속 연주해달라고 고집했던 이유는 사실 자신도 엘리오만큼이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바흐의 원곡은 ‘카프리치오 BWV 992’다. 바흐작품번호(BWV) 992로 분류되는 이 음악은 1704년 바흐의 나이 19살에 작곡됐다. 둘째 형인 요한 야콥 바흐(독일·1682~ 1722)가 멀리 스웨덴 군대의 오보에 연주자가 되어 떠나게 되자, 동생 바흐는 이 음악에 아쉽고 슬픈 마음을 담았다. 보통 음악 장르에서 ‘카프리치오’는 일관해서 변덕스러운 곡을 뜻하지만 매번 그렇지는 않다. 간혹 작곡가의 개성과 시대에 따라 자유로운 의미를 가진다. 특별하게 일관된 형식을 갖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내는 짧은 길이의 곡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주인공 엘리오가 바흐의 ‘카프리치오 BWV 992’를 연주하는 장면. 이 곡은 일찍 부모를 잃은 바흐가 어머니 역할을 했던 둘째 형이 군대 오보에 연주자가 돼 떠나게 되자 그 슬픔 마음을 담아 작곡한 작품이다.
바흐의 ‘카프리치오 BWV 992’는 다악장 형식으로 각 악장에 제목이 붙어있다. 바흐의 곡 중에서 표제가 있는 몇 안 되는 곡이다. 모두 6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곡의 연주 시간은 약 11분가량이다. 영화에서는 5번째의 아리아 ‘마부의 아리아’가 흐른다. 형을 태우고 가는 마부는 그저 자기 일을 하는 것이라 감정을 보이지 않고 힘차게 달릴 뿐이다. 옥타브로 동일음이 연주되는 부분은 마부가 부는 나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작곡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독일의 중부에 위치한 튀링겐 주의 작은 마을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음악 가문이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삼촌도, 부모님도 바흐의 아들들도 모두 음악가로, 모였다 하면 음악이야기를 하고 연주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음악적인 분위기는 이미 뱃속부터 형성된 거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루터가 주장한 개신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했다. 독일 음악 전통에 기반을 두고 종교적인 음악을 주로 작곡했지만 이탈리아나 프랑스 풍의 음악을 받아들여 세속적인 음악도 작곡했다. 그의 음악적인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대단하기에 우리는 그를 서양음악의 아버지라 부른다.

하지만 음악가로 위대한 그의 업적과는 별개로 인간으로 바라보는 바흐는 한편으론 안쓰럽다. 그는 10살 쯤 엄마, 아빠를 차례로 모두 잃었다. 그래서 바흐는 큰 형과 살면서 음악을 배웠다. 나중에 형이 자신의 가정을 갖게 되자 15살 바흐는 독립을 하고, 북부 독일 뤼벡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18살부터 돈을 벌기 위해 일찌감치 삶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바흐의 음악활동은 머물렀던 곳을 기준으로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 시절(1703~1708), 바이마르 시절(1708~1717), 쾨텐 시절(1717~1723), 라이프치히 시절(1723~1750)로 나눈다. 마지막 라이프치히 시절엔 토마스 교회의 악장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성악곡 칸타타를 작곡한다. 라이프치히 시절은 바흐가 칸타타 작곡에 가장 전념했던 시간이다.

바흐에게 형은 부모의 다른 이름이자 친구이며 음악적 동료였다. 큰형이 아버지 역할이라면 둘째 형은 어머니 역할을 했을 터인데, 그런 형이 떠난다고 하니 더 마음이 애절했으리라. 각별했던 그들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은 음악 안에서도 느껴진다. 여자들의 자매애보다 남자들의 형제애가 더 강하게 발휘되는 경우가 있다. 위대한 바흐 삼 형제의 브로맨스!

영화 속 엘리오는 이 음악을 연주하며 올리버를 생각하고, 바흐는 떠난 둘째 형을 생각했을 것이다. 음악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그해 여름, 엘리오를 찾아왔다 떠나간 올리버를 기억하며 음악을 들어본다.

/조현영 피아니스트·아트 앤 소울 대표

추천음반

◇바흐 ‘Capriccio in B flat major, BWV 992’ 중 ‘no.5’

미국의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의 연주다. 192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인 최초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수상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승승장구하지만, 1965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오른손 질환 때문에 양손 연주를 하지 못하게 된다. 좌절하지 않고 오랜 훈련과 명상을 통해 기적적으로 양손 연주에 성공했지만 2020년 아름다운 별이 되어 세상과 이별했다. 음악인으로서의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 레온 플라이셔의 바흐가 더욱 특별하다.

◇바흐 ‘사랑하는 형과의 작별에 부치는 카프리치오’(B flat major, BMW 992)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교육가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연주다. 미국의 레온 플라이셔와 비슷한 연배인 그녀는 1924년에 태어나 1993년까지 활동했다.

독일 라이프치히 바흐 국제 콩쿠르 제1위를 시작으로 1955년 러시아 국가상을 수상했다. 바흐와 쇼스타코비치 전문가로 알려진 그녀의 연주는 바흐의 음악을 현대식으로 연주하면서도 전혀 이색적이거나 튀지 않게 우아한 바흐를 들려준다. 기품 있는 바흐의 정수를 느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