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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생애·유물 품은 추사관을 가다, 유배길을 걷다] 명소로 떠오른 제주 추사 유배지
‘세한도’ 모티브로 건축가 승효상 설계 ‘추사관’ 관람객 발길
고행의 유배길 ‘인연의 길’·‘사색의 길’ 새 관광코스 자리매김
2021년 11월 09일(화) 02:30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영감을 얻어 유명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한 추사관 전경.
각박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유배문화와 전남 유배지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손암 정약전과 다산 정약용 형제, 추사 김정희, 우봉 조희룡, 원교 이광사 등은 당대에 죄인으로 신안 흑산도와 강진, 제주도, 임자도, 신지도 등 유배지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수백 년이 흐른 요즘에는 역경 속에서도 학문·예술세계의 넓이와 폭을 확장한 역사인물로 재평가받고 있다. 특히 제주도에 위치한 추사관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곳인 데다 ‘세한도’에서 모티브를 얻은 빼어난 건축미로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의 공자 자한 27장에 나오는 글이다.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1844년(헌종10년)에 그린 이 작품에는 단출한 집 한채, 말라 비틀어진 소나무 등 마른 나무 세 그루가 그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유배살이를 하며 벗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그림으로 한 겨울의 세한을 참고 견디면 곧 따뜻한 봄날을 맞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경주 김씨인 추사의 집안은 조선 시대 손꼽히는 명문이었으나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와 대립하면서 제주로 유배길에 오른다. 추사는 혹독한 고문 끝에 제주도에서 서남쪽으로 80리나 떨어진 대정마을에 위리안치되는 고초를 겪는다. 위리안치는 유배형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형벌이다. 하지만 추사는 당시 관내 수령이 배려해준 덕분에 비교적 자유롭게 산방산과 물이 좋은 안덕계곡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주변을 걸으며 추사는 유배생활로 지쳐가는 심신을 추스렸다.

실제로 추사의 예술 세계는 제주도 유배 시절 만개했다고 전해진다. ‘추사체’가 완성됐고, ‘세한도’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1844년 추사는 역관이었던 제자 이상직(1804~1865)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었다. 이상직이 중국에 오가면서 수시로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것에 감동을 받아 선물한 것이다. 추사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이 떠났지만 이상직은 스승에 대한 존경에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일까. 추사 김정희 유배지는 코로나19로 힘든 요즘, 성찰과 힐링의 장소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송리에 위치한 유배지에는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2008년 안성리(1661-1)일대 5025㎡ 규모의 유배지에는 유물전시관인 추사관과 제자 강도순의 집을 복원한 초가 등이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지난 2010년 개관한 추사관(秋史館)은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곳으로, 건물의 외양은 극도의 절제미를 추구했던 추사의 걸작 ‘세한도’의 집을 모티브로 삼았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영감을 얻어 유명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한 추사관 내부.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1192㎡로 건립된 추사관은 추사기념홀, 유물전시관, 상설전시실, 체험실 등으로 꾸며졌다. 추사관에 들어서면 추사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공간과 가계, 제주에 유배오기 전과 유배시절, 유배 이후의 삶과 작품, 제자와 지인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상설 전시실이 나온다. 특히 제주로 유배를 와야 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험난한 귀양살이, 추사체를 완성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도 만날 수 있다.

추사관을 찾은 한 관람객이 전시장에 진열된 추사의 작품들을 관심있게 살펴보고 있다.
무엇보다 전시실을 지하에 들여 놓았지만 전혀 지하 특유의 어두운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 설계가 돋보인다. 전시관을 둘러 보고 추사홀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는 동선으로, 추사홀은 추사가 추구했던 절제미를 빈 공간 그 자체로 느끼도록 설계됐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서 영감을 얻어 유명 건축가 승효상씨가 설계한 추사관 내부.
현재 추사관에는 추사연구의 권위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부국문화재단 남상규 이사장, 고 조재진 추사동호회 대표 및 회원 등이 2006년 기증한 추사 선생 유물 103점과 제주도가 매입한 우물 227점이 소장돼 있다.

추사가 쓴 편지와 시 등 유묵 17점을 수록한 ‘辛亥年策歷’(신해년책력·보물제547-2호), 글씨를 쓰는 법을 밝힌 ‘阮堂筆帖’(완당필첩), 제주 귀향시절인 1846년 충남 예산 화엄사에 예서체로 써써 보낸 ‘无量壽閣’(무량수각) 등 포함돼 있다.

추사유배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다름 아닌 ‘추사 유배길’이다. 제주관광공사가 조성한 유배길은 올레길 못지 않게 입소문이 나면서 새로운 관광코스로 자라잡고 있다. 고단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집념과 사색으로 역사적, 문화사적으로 걸출한 성과를 일궈낸 추사를 기리고 그 가치를 후대에 알리기 위해 추사와 관련있는 장소들을 연결한 것이다.

‘인연의길’은 추사의 한시, 편지, 차 등을 통해 추사의 인연들을 떠올리는 길이다. 제주추사관을 출발해 수월이 못(1.1㎞)→추사와 감귤(1.7㎞)→제주 옹기박물관(3.2㎞)→노랑굴→검은굴→추사와 매화(4.3㎞)→곶자왈(5.6㎞)→추사와 편지·추사와 말(7.5㎞)→추사와 차(오설록 녹차밭·8㎞)를 거쳐 다시 제주추사관에 도착하는 코스다. 8㎞ 남짓한 코스로 역시 약 3시간이 소요된다.

‘사색의 길’은 산방산의 웅장함과 안덕계곡의 경관을 따라 걷는 길이다. 바다, 오름, 계곡의 경치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코스다. 대정향교를 출발해 100개가 넘는 호를 가진 추사의 다양한 도장들을 돌에 새긴 모습을 볼 수 있는 추사와 전각(0.2㎞)→추사와 건강(2.6㎞)→추사와 사랑(4.9㎞)→추사와 아호(5.3㎞)→추사와 창천·창천유배인들(10.1㎞)을 지나 대정향교로 돌아오는 약 10㎞ 여정으로 4시간이 소요된다.

/제주=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