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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박수근, 지역 넘어 전국 브랜드가 되다
(5) 강원도 인제 박인환문학관, 양구 박수근미술관
1997년부터 추진해온 ‘강원의 얼 선양사업’ 결실
# 인제 박인환문학관
‘목마와 숙녀’ ‘세월이…’ 대표작
한국전쟁 후 사회·문화적 현장
집필 공간·역사적 명소 재현
# 양구 박수근미술관
2021년 07월 19일(월) 01:30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에 자리하고 있는 박인환문학관 전경. 지난 2012년 개관 이후 인구 3만 여 명의 인제군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강원도 인제군의 박인환문학관 앞에 자리한 동상에 앉자 귀에 익숙한 시 한편이 흘러 나온다. 한국모더니즘의 대표 시인 박인환(1926~1956)의 ‘목마와 숙녀’다. 방문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하기 위해 제작된 동상은 박인환 시인이 코트를 입고 바람을 맞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듯한 모습의 상반신 조형물이다. ‘시인의 품’으로 불리는 동상의 안으로 들어가 앉으면 센서에 의해 ‘목마와 숙녀’를 읊는 가수 박인희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잠시 마음을 열고 음악에 귀를 기울이면 일상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박인환문학관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지난 2012년 개관한 박인환문학관(인제군 인제읍 인제로 156번길)은 인구 3만 여명의 인제군이 자랑하는 문화공간이다. 2009년 12월 시인의 생가 터에서 첫삽을 뗀 후 3년 간의 공정을 마치고 지하1층, 지상2층, 건축면적 640㎡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제군의 어제와 오늘을 볼 수 있는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옆에 자리한 문학관은 1·2층 전시실, 야외전시실로 꾸며졌다.

박인환문학관의 전시시설의 특징은 박인환 시인이 활동한 한국전쟁후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과 시인과 관련된 인물, 서점, 다방, 선술집 등의 역사적 명소를 현장감 있게 재현했다는 것이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1950년대 명동거리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시인의 일대기와 아카이브를 전시해 놓은 공간을 지나면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의 대표작들을 탄생시킨 다방과 선술집, 책방 등이 그대로 재현됐기 때문이다. 책이나 사진, 유품들을 진열장에 배치해 놓은 여타 문학관과 달리 시인이 활동했던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현장’들이 펼쳐져 흥미롭다.

박인환문학관에는 시 ‘세월이 가면’을 탄생시킨 은성다방이 그대로 재현돼 있다.
그 시절 문인들의 아지트이자 박인환의 일터 였던 책방 ‘마리서사’를 비롯해 모더니즘 시운동이 시작된 선술집 ‘유명옥’(김수영 시인의 모친이 운영), 1950년대 문인들의 희로애락이 깃든 ‘봉선화 다방’,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명동의 ‘모나리자’, ‘동방싸롱’ 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인 공간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옹기 종기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은성다방’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로 시작되는 시 ‘세월이 가면’을 쓴 선술집이다. 탤런트 최불암씨의 모친이 명동에서 운영했던 곳으로 박인환, 김수영, 변영로, 전혜린, 이봉구, 오상순, 천상병 등은 희미한 백열등 아래 놓인 양은 주전자와 술잔을 사이에 두고 문학과 예술을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은성다방’은 관람객들이 막걸리 잔을 들고 그 시절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포토존으로도 인기가 높다.

양구 박수근미술관

인제군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달려 양구군 박수근로에 들어서자 거대한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마을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듯한 ‘국민화가’ 박수근의 전신 동상이다. 주변을 둘러 보자 5층 높이의 아파트 외벽에도 그의 대표작인 ‘빨래터’ 등으로 장식돼 있다. 순간, ‘박수근의 마을’에 입성한 게 실감났다. 박수근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군립 ‘박수근미술관’(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박수근로 265-15)은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양구군이 21억 원의 예산을 들여 1만8480㎡의 박 화백 생가 터에 2층 건물로 건립한 미술관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이다.

지난 2000년 양구군이 실시한 박수근미술관 기본설계 공모에서 고 이종호 건축가(1957~2014·전 한예종 교수)는 건축과 일상의 경계를 없애기 위해 박수근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투박하고 우둘투둘한 돌의 질감을 건물로 형상화 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10월 25일 문을 연 미술관은 독특한 건축물에 비해 유화가 한 점도 없는 ‘무늬만 박수근 미술관’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 단위로서는 3억 원의 작품 구입예산을 편성했지만 1점에 수억 원에 달하는 거장의 컬렉션을 소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당시 개관식에 참석했던 박명자 갤러리현대 대표 등 유명인사들이 미술관의 딱한 사정을 접하고 텅빈 수장고를 채우기 위해 통큰 기증을 하게 됐다. 박명자 대표가 기증한 ‘굴비’(15 x 29cm·하드보드에 유채·1962년 작)는 미술관의 ‘체면’을 세워준 소장품 1호다. 박 대표의 기증 이후 조재진 회장이 ‘빈수레’(21x30cm·하드보드에 유채·1960년 작)를 쾌척하는 등 독지가들의 릴레이 기부와 양구군의 전폭적인 예산지원으로 10여 점에 달하는 유화를 소장하게 됐다. 여기에 지난달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족이 ‘아기업은 소녀’ 등 유화 4점과 드로잉 13점을 기증한 덕분에 유화 작품 17점, 드로잉 작품 112점을 보유하고 있다.

박수근미술관의 소장품 1호인 ‘굴비’ (15 x 29cm, 1962년 작)
미술관을 찾던 날은 지난 4월 고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이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이 열리고 있었다. ‘2021 아카이브 특별전-한가한 봄날, 고향으로 돌아온 아기업은 소녀’(5월6일~10월17일)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회에는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작인 ‘아기업은 소녀’,‘농악’, ‘마음풍경’, ‘한일’(閑日)등 유화 4점과 드로잉 13점, 미술관 소장작이 관람객을 맞이했다.

이건희 컬렉션이 박수근 미술관에 오게 된 데에는 홍라희 여사와의 인연이 있었다. 지난 2004년 10월, 박수근 미술관 개관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당시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이었던 홍 여사가 명예관장이었던 유홍준 전 문화재정장에게 미술관의 박수근 동상 옆 빨래터 주변 사유지를 매입해 자작나무 숲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때 기증해 식재한 자작나무 숲은 현재 박수근미술관을 찾는 방문객들의 힐링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박인환문학관과 박수근미술관이 강원도의 브랜드가 된 데에는 지난 1997년 부터 추진해온 ‘강원의 얼 선양사업’이 있었다. 도를 대표하는 호국·충절·개혁·문화예술인 18명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기 위해 도비와 시군비 등 모두 421억 원(2019년 기준)의 사업비를 투자해 6개 분야, 17개 사업을 진행한 것이다. 인제의 박인환·한용운을 비롯해 양구의 박수근, 평창의 이효석, 춘천의 김유정 등의 삶과 예술혼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특히 양구군은 지난해 박 화백의 대표작인 ‘나무와 두 여인’(27x19.5cm·하드보드 위 합지에 유채·1950년대 중반)을 7억 8750만 원에 구입하는 등 꾸준히 한 두점씩을 구입하고 있다.

내년 개관 20주년을 맞는 박수근미술관은 제2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최근 7억 8천여 만원의 예산을 들여 박수근 화백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한 AR, 이미지래핑, 3D 입체영상, 인터렉티부 등 실감형 콘텐츠와 체험존으로 구성된 퍼블릭 전시관(지상 1층, 연면적 428.08㎡ 규모)을 개관한 데 이어 문화예술계 일각에서 국립미술관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박수근미술관이 ‘강원도의 힘’을 보여줄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인제·양구=글·사진 박진현 문화선임기자 jhpark@kwangju.co.kr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