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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걸음
2021년 01월 10일(일) 23:00
박용수 광주동신고 교사
어디에 있어도 좋은 사람이 있듯이 어디에 붙여도 좋은 단어가 있다. 봄이나 미소는 누구든지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주는 단어이고, 사랑과 꿈은 누구나 설레게 한다. 용기는 누구든지 힘을 북돋아 주고, 겸손은 또 누구든지 닮고 싶은 단어이다. 칭찬과 희망은 움츠린 어깨를 당당하게 펴 주는 단어이다.

낱말 중에는 햇-을 붙이면 새로워지고 개-를 붙이면 낮아지듯이 혼자 쓸 수 없어서 누군가와 어울려야 되는 단어가 많다. 파생어는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 붙어야 온전한 단어가 된다.

반면에 첫-은 누군가와 꼭 어울려야 더욱 빛이 나는 단어이다. 축하도 하는 이와 받는 이가 대등할 때 기쁨이 배가 되듯, 첫-은 서로 함께했을 때 잘 어울려서 합성어에 속한다. 첫돌, 첫사랑, 첫눈, 첫인상, 첫걸음….

첫-은 어디에 붙어도 그 단어를 빛내는 마법 같은 단어이다. 어떤 낡은 것조차 처음이나 시작, 새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불로장생의 단어이고, 첫사랑 첫 키스처럼 영원불변해야 하는 것에만 붙는 희망과 설렘이 담긴 단어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싶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신영복 ‘처음처럼’)

우리는 매일 아침을 맞는다. 그런 아침이 누군가는 첫 아침이겠지만 30년째, 50년째 같은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침은 매일 같은 아침이 아니고, 어제 만난 그 사람도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피부는 매일 벗겨지고, 4주마다 완전히 새로운 피부로 바뀐다. 뼈의 조직은 끊임없이 죽고 다른 조직으로 재생된다. 이렇게 몸 전체의 모든 뼈가 새롭게 만들어지기까지 7년이 걸린다고 한다. 몸이 이럴진대 수시로 변하는 마음은 더해 무엇하겠는가. 무심히 서 있는 나무도 매해 껍질을 벗고 새잎을 내고, 날아가는 새도 매해 새로운 깃털로 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임이 너무도 분명하다.

매일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의 걸음은 시인의 시처럼 싱싱하다. 굳세고 힘이 들어 있다. 다들 코로나19로 인해 의욕을 잃고 우울해 하고 짜증을 내는데, 그들의 발걸음에는 두려움이 없다.

지금은 프로야구 인파 속에서 마음껏 소리칠 수도 없고, 말바우 시장의 혼잡한 틈새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동질감도 느낄 수 없다며 하소연한다. 그러면서도 혹여 어디서 헛기침이라도 하면 무엇이라도 옮길 듯 깜짝 놀라 바라보는 한겨울이다.

그래서 희망이 필요하다. 새롭게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세상도 삶도 그리고 만남도 실상 첫걸음에서 시작한다. 힘들고 절망적일 때마다 우린 희망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이겨왔다. 실패했던 일들이 후회로 남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은 것만이 후회로 남는다.

첫발을 내디딜 때는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워서 가 보지 못한 세계가 얼마나 많았던가.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포기했고, 거부가 두려워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고, 좌절이 무서워 포기한 도전이 얼마이던가.

첫걸음, 첫-이 붙은 단어 중에 첫걸음이 가장 좋다. 아이는 아장아장 걷지만 두려움은 없다. 조금 흔들리지만, 그보다 기품 있고 우아한 걸음은 없다. 아이가 걷기까지 얼마나 많이 기었던가. 아이는 넘어질지언정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늘 내가 걷는 이 걸음도 첫걸음이다. 비록 같은 집을 나서고 같은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일지라도 어제의 그 걸음이 아닌 새로운 걸음이다. 지금 내가 내디디고 있는 땅도 새 땅이고 마음도 새 마음이다. 오늘 아침부터는 배에 힘 좀 주고 당당하게 걷고 싶다. 좀 구불구불하되 조붓한 길도 좋다. 마음을 비우고 혼자 걸어도 좋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가 엄마를 보듯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아이의 입술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이가 아장아장 어머니에게 가듯 앞으로 첫걸음을 내디디고 싶다. 아이가 첫걸음을 내딛듯 세상에 슬며시 내 마음을 새롭게 내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