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눈도 결국 길 위에서 다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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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눈도 결국 길 위에서 다시 만난다
2021년 01월 05일(화) 08:00
임혁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4년
코로나19를 피해 ‘방콕’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의 새벽이었다. 창을 닫고, 블라인드를 두껍게 친 탓에 오래간만에 광주를 덮는 눈 소식을 뒤늦게 알았다. 남쪽 도시에 살면서 펑펑 내리는 눈을 볼 기회가 일 년에 몇 번 안되는 촌놈은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왔다. 가로등 불빛을 조명 삼아 떨어지는 눈을 한참 동안 구경했다. 점차 자동차며, 나무며, 심지어 담벼락과 길마저도 하얗게 덮여 갔다. 나는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기 위해 잠깐 집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막 쌓인 눈길에 첫발자국을 찍으며 걸어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 사이에 누군가에게 첫걸음을 빼앗겼다. 나말고도 밤잠을 설치고 있는 올빼미족이 더 있었나 보다. 혹여나 만나면 민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먼저 찍힌 발자국을 따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선행자가 나무 위에 쌓인 눈을 툭치고 갔는지, 삐져나온 나뭇가지 아래로 눈 더미가 떨어져 있었다. 좀 더 뒤따라가다 보니 자동차 뒷 유리에 쌓인 눈을 음각해 고양이를 그려 놓았다. 누군지 모를 사람 덕분에 오랜만에 기억에 남는 하루를 보냈다. 나이가 몇 살이든지 간에 두텁게 쌓이는 눈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조선시대 첫눈 내리는 날은 마치 현대의 만우절처럼 장난과 거짓말이 허용되는 날이었다. 세종실록에는 “고려시대에는 첫눈이 오는 날에 남을 속이는 풍속이 생겼고, 이런 풍속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첫눈이 내리는 날 눈을 상자에 담아 형인 노상왕(정종)에게 약이라 속여 보냈다. 헌데 노상왕은 태종의 장난을 눈치채고 상자를 전달하러 온 환관 최유를 잡으려 했다. 보통 노상왕이 잡으려 하면 무조건 붙잡혀 주는 것이 예의지만, 환관은 불경스럽게도 도망을 쳤다. 바로 첫눈 오는 날은 이런 무례와 장난이 용서됐던 것이다. 결국 노상왕은 최유를 놓쳤고, 장난에 당한 노상왕은 태종에게 술을 샀다고 한다. 우리 민족 해학과 풍자의 문화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날 외출하니 학교 운동장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비록 만들어진 눈사람들은 서로 거리 두기를 하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잃어버린 일상을 찾은 기분이었다. 바꿔 말하면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일상을 잃어버렸다는 의미기도 하다. 비정상적인 한 해를 보내야 했고, 당장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대로 웃음과 일상을 찾으려 했다. 각자의 노트북 앞에 술상을 차리고 연말 랜선 파티를 열었고, 좋아하는 가수의 온라인 콘서트에도 참석했다. 오늘은 내일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다.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아렉산드르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한 구절이다. 과연 2020년이 그리워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코로나19가 끝나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때 함께 어려운 시간을 잘 견디고 여기까지 왔다며, 모두 웃으며 말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만들었으면 한다.

친구와 가족끼리 ‘삼삼오오’(三三五五)보단 ‘삼삼사사’(三三四四) 모여 눈사람을 만들거나, 태종과 노상왕처럼 장난스러운 선물을 보내는 것 같은 하루를 쌓아 보자. 서로 거리를 두며 떨어지는 눈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길 위에서 다시 만난다. 코로나19가 끝나면 우리도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까지 모두가 유머와 재치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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