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남·일신방직 공장 터에 대한 사유
2020년 11월 18일(수) 07:00
박 홍 근 포유건축 대표·건축사
장소를 이르는 말인 터, 여기에 새겨진 무늬를 터무니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은 삶의 근본을 본인들이 사는 터에서 찾았다. 터에는 그곳만의 고유한 무늬가 있다. 사람이 만든 것도 일정 세월이 지나 역사적 기억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터의 무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그린 무늬는 인문(人文)이라고 한다. 사람의 이야기, 생각, 흔적, 추억, 기억 등등 인간의 삶이 그린 무늬를 말한다. 터에는 고유한 터무니와 인간이 그린 무늬가 함께 한다. 이는 그 장소만의 정체성이고 가치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 공장 터에 대한 개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방직공장은 1935년에 지어진 근대 산업 유산으로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장소다. 공장의 설립 배경, 과정, 운영, 사람 등등에 관련된 수많은 스토리가 있다. 이 공장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는 광주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히스토리며, 자산이다.

그런데 토지 소유자는 이곳의 극히 일부를 존치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포함한 개발 계획을 광주시에 제출하여 협의하고 있다.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기존의 터무니는 거의 사라지고 인문은 찾아볼 수 없는 계획안이다. 그런데 대안 제시보다는 토지주가 제시한 것을 토대로 검토를 하는 것 같다. 광주시는 종합적 도시 공간 계획 전략이 있는 건지, 도시 철학인 ‘인본’을 어떻게 구현하려는 것인지 현 황상에서는 읽을 수 없다.

첫째, 광주시는 그간에 했던 도시 공간 계획을 다시 봐야 한다. 아시아 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을 위한 ‘5대 문화권’ 계획은 이 지역의 근대 산업 유산을 이용한 ‘시민예술촌’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2025 광주광역시 도시재생계획’에 따르면 이곳은 ‘도시 경제 기반형’ 재생 지역으로, 주변과 연계하여 근대 산업 문화 유산을 중심으로 한 ‘도심 관광거점 활성화 및 새로운 경제 기능 도입’을 중심으로 개발하는 것으로 제안되어 있다. 이것들이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광주시의 도시 공간 구상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완전 다른 아파트 단지 개발 계획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논의하고 있다. 캐비닛 속에 있는 공간 전략들을 다시 찾아봐야 한다.

둘째, 터에 대한 기본 자료 조사를 해야 한다. 광주시는 ‘2018 근대 건축물 기록화 사업-구 종연방적 전남공장’ 보고서를 통해 일부 인문 자료 조사와 1930년대 지어진 3개 동의 건축물에 대한 실측 기록화 작업을 하였다. 화력발전소, 보일러실, 고가 수조 건물이다. 이 터에서 이곳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전체 공장 부지에 대한 물리적, 인문적 조사를 통해 광주 도시 역사에서 근대 산업 유산의 가치에 대한 평가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이후 활용 방안을 협상해야 한다. 사업주가 제시한 부동산 가격 기준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셋째, 다른 결과를 원한다면 기존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공장 터를 가로질러 8차선 계획 도로가 있다. 이 도로를 개설하면 터의 주요 자산들이 훼손된다. 길은 사람의 필요에 따라 만드는 것이고, 직선과 십자(+)형 네거리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물처럼 흘러도 된다. 터에 대한 물리적, 인문적 조사를 바탕으로 근대 산업 유산으로 보존·활용할 부분을 최대한 남겨두어야 한다. 그 다음 혹시 개발할 부분을 정해야 한다. 이때는 제반 법규나 규정-건폐율, 용적율, 이격 거리, 용도 제한, 층수 제한, 상가 비율 등-에 유연할 필요도 있다. 광주를 위한 귀한 자산을 얻으려면 민관이 상생해야 한다. 특별함을 얻고자 한다면 접근 방법도 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광주시에서 공장 터를 매입해 도시 공간 계획에 따라 개발해야 한다.

광주는 다수의 근대 건축 유산들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사라졌고, 보존되어 활용되는 사례는 매우 빈약하다. 다행히 1960년대 지어진 ‘전일빌딩’과 1970년대에 만들어진 ‘광주시민회관’이 우여곡절 끝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와 사랑을 받고 있다, 광주의 문화 자산이 되었다. 이 두 건물이 여기까지 이르는 데, 그 결정적 시작점은 당시 행정 책임자인 시장의 결단과 역할이 가장 컸다.

이번 전남·일신방직 공장 터의 개발 방향과 운명도 현 시장이 어떤 철학으로 도시를 바라보는지가 판단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최근에 광주시가 발표한 ‘광주 도시·건축 선언문’의 첫 줄은 ‘인본의 정신으로 문화를 밝혀 온 자랑스런 도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시장의 철학과 실천 의지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