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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2020년 10월 16일(금) 00:00
황 성 호 신부·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광주천변을 걷다 보면 좌우가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다. 시청을 향해 걸어갈 때 오른쪽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해 두었고, 왼쪽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고 자전거도 탈 수 있도록 넓게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가끔 이것저것 생각거리들을 정리하기 위해 천변 오른쪽을 거닐 때가 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내 옆으로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가는 자전거들이 있다. 자전거 금지 표지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쌩’ 하니 내 옆을 지날 때면 산책을 방해 받는 것 같아 불쾌하다. 잘못 진입한 것이겠지 하지만, 속으로 ‘저 사람 제정신이야! 여긴 자전거 금지 구역인데’라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것도 잠시,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속 걷는데 광주천에는 중간 중간에 징검다리들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으니 좋고, 징검다리 중간에 서서 광주천의 흐름과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참 좋다.

우리는 삶의 길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 오랫동안 내 몸에 익숙해져 있는 습관들 또한 그것이 내 건강과 삶을 망친다고 해도 변화시키기 어렵다. 잘못된 관점과 이념으로 고착화되어 버린 생각도 고치기 어렵다.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음을 멈추기가 어렵다. 왜 이렇게 변화하는 것이 어렵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는 것도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지 않는다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오만과 탐욕으로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가 떠오른다. 마태오 복음 21장 33절에서 43절까지의 말씀이다. 한 주인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수확철이 다가오자 주인은 자기 몫을 위해 종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여 버린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지만 이들도 소작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급기야 주인은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저자는 상속자다’라며 포도밭을 독차지하기 위해, 오만으로 시작해 탐욕의 정점인 폭력으로 그 아들마저 죽이게 된다. 그 주인은 그 소작인들을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자신에게 소출을 내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그 밭을 내어주고 만다.

이 예수의 비유는 당시 하느님의 백성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야 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토대인 십계명을 삶으로 살아 내도록 이끌어야 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당시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사명은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 살기 좋은 나라,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자기 것으로 착각했고,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스스로의 오만과 탐욕과 이기심으로 잃어버렸다. 소작인들로 비유되는 이들의 사명은 바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율법과 지위라는 기득권의 힘으로 사람들이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았고,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사랑과 희생의 말씀을 더럽혀 하느님까지도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팔아버린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사명인 징검다리의 역할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종교와 신앙인의 역할은 바로 징검다리의 역할이다. 오른쪽과 왼쪽 어느 쪽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부와 가난 사이에서, 풍요와 결핍 사이에서, 강함과 약함 사이에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종교와 신앙인들의 사명이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고통 받는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새롭게 일어설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종교와 신앙인들은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 벼랑 끝에 서서 갈등하지 않도록 종교와 신앙인을 넘어서 우리가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더불어 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