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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마한의 수리 시설
마한에서는 식량생산을 위해 저수지와 방조제를 만들었다
여러 하천 유적에서 보(洑) 확인
김제 벽골제, 해안 방조제로 추정
2020년 05월 20일(수) 00:00
벽골제 안내판 (아래쪽 평야는 당시에는 간석지였음)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10> 마한의 수리 시설



지난 글 <9>에서는 마한의 衣, 食, 住 가운데 식생활에 대해 살펴보았다. 마한 유적에서 출토된 보리, 밀, 벼 등은 품종개량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관심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농사에 있어서는 품종개량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더 있다.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을 갖추는 것이다. 특히 벼를 안정적으로 재배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을 확보하여 제때에 공급해야하기 때문에 저수지와 같은 수리시설을 갖추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살포(왼쪽부터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금산 수당리 석곽묘) (왼쪽 길이 168cm)
◇논에 물을 대는 일

이제는 겪어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가뭄 피해는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특히 벼농사에는 충분한 물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가뭄은 벼농사에 큰 피해를 주었다.

청동기시대 벼가 재배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곡물들이 밭에서 경작되었다. 벼 역시 밭에서 재배할 수도 있지만 수확량이 적어지기 때문에 논이 없는 경우에나 그렇게 할 뿐이다.

아열대지역이 원산지인 벼는 저습지나 수전에서 경작해야만 수확량이 많아진다.

벼농사가 시작되었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부터 간단한 수로를 갖춘 논 뿐만 아니라 수리시설의 일종인 보가 인근 하천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논은 생산력을 높여 개인과 사회를 안정되고 부유하게 만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늘 좋은 논을 만들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대규모 수리시설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수리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물을 제때에 공평하게 공급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물은 하천에 설치된 보나 계곡에 만들어진 저수지에서 물길을 따라 여러 논으로 흘러오게 되는데 이 물길을 트거나 막는 일이 공정하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불만이 생기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 물길을 막거나 트는데 사용하였던 도구는 살포였다. 살포는 매우 특별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무덤의 규모나 다른 출토유물들을 보면 그 주인공은 지역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꼬를 튼다’는 말은 원래 살포와 관련된 것이지만 지금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며 살포를 가졌던 사람이 물을 조절하듯이 공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살포를 쥐었다고 해서 내 논에 먼저 물을 대는 일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고, 내 논에만 물을 대는 일(我田引水)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광주 동림동유적에서 조사된 5~6세기 보 시설(2003년 호남문화재연구원 발굴)
◇문헌기록에 보이는 수리시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건국 초기부터 가뭄 피해가 자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온조왕 28년에는 가뭄 때문에 사형수를 석방하였고, 기루왕 14년에는 크게 가물어서 보리가 남아나지 못하였으며, 고이왕 15년에는 가뭄 때문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다루왕 6년에는 나라 남쪽에 명을 내려 논을 만들게 하였다.

가뭄 못지않게 큰 피해를 초래하는 것은 홍수였다. 개로왕조에는 백성들의 가옥이 자주 강물에 허물어져서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강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토목공사는 국력을 소진시켜 개로왕이 고구려 군에게 참수 당하고 도읍을 공주로 옮기게 만들었을 정도로 백제에 큰 피해를 입혔다.

신라본기에는 흘해이사금 21년(330년)에 둘레 1800보에 달하는 벽골지(碧骨池)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벽골지는 현재 김제 벽골제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위치상 신라에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1970년대 발굴조사에서 방사성탄소연대가 350년 전후로 측정되어 신라 흘해이사금 21년에 해당하는 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논란은 남아 있다.

벽골제 일대 지형도(물이 저장된다면 안쪽 평야가 모두 물에 잠기게 됨)
◇김제 벽골제는 방조제로 추정

김제 벽골제는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저수지라고 널리 알려져 1963년 1월 21일 국가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었고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유적이 잘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벽골제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지만 알려진 바와 같이 350년경이라면 신라도 백제도 아닌 마한에 해당할 가능성도 있다. 기술적인 면에 있어 청동기시대의 논산 마전리 유적이나 마한의 보성 조성리 유적 등을 보면 당시 마한의 기술력은 충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제 벽골제가 가지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기능에 있다. 저수지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적인 저수지의 입지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벽골제는 광활한 평야지대를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물이 저장되면 안쪽 논들이 모두 물에 잠겨버린다. 벽골제 바깥 논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삼국시대 벽골제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벽골제에 물을 저장하였다면 정작 이 물을 공급할 농경지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 4월 23일에는 현재 길이가 2.5km인 벽골제에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어 더욱 의구심을 키워준다. 현재의 북쪽 끝에서 1.3km 떨어진 김제시 장화동 427번지에서 통일신라 수문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둑 길이가 3.8km로 늘어나게 된 것이고 그만큼 물에 잠기는 논이 더 넓어지게 되었으니 저수지로 보기는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벽골제는 무엇이었을까? 현재 벽골제 바깥에 조성되어 있는 넓은 평야지대는 당시 바닷물이 올라오는 간석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해답은 쉽게 얻을 수 있다. 벽골제는 해안 방조제였을 것이다.

고대 해수면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보면 4~5세기는 전지구적으로 온화한 환경 속에서 해수면이 상승하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해수면이 1m만 상승하였더라도 만조 때에는 벽골제 안쪽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왔을 것이다.

벽골제는 3세기 이후 온화해지기 시작한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날이 깊숙하게 밀려오던 바닷물을 막아 안쪽의 논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삼국시대 해수면 상승은 통일신라 원성왕 6년(790)에 벽골제를 증축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최소한 8세기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수면은 그 이후부터 낮아지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다시 높아지고 있다. 20세기의 해수면 상승은 이미 30cm를 넘기고 있으며 머지않아 1m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바다를 끼고 있는 대도시들이 물에 잠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전세계가 힘을 모아 온난화를 줄여 나가는 한편 취약 지역에 벽골제와 같은 방조제를 만들어 나가는 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