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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채경, 북송 멸망 일조한 ‘망국의 재상’
2020년 04월 21일(화) 00:00
채경(蔡京, 1047~1126)의 자는 원장(元長)으로 복건성 유현 출신이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 휘종의 재상으로 왕조의 멸망에 기여했다.

희녕 3년(1070) 진사시에 급제했다.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역량이 뛰어났고 직감력과 변신하는 재주를 갖추었다. 왕조를 멸망시킨 ‘망국의 재상’으로 송사 간신전(姦臣傳)에 포함되어 있다. 양주지사, 항주지사 등을 역임한 그가 재상으로 기용된 것은 황태후의 급서, 환관 동관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크다. 신종의 황후 상씨는 단왕 조길을 황제로 낙점했다. 일정기간 수렴청정을 거쳐 새 황제가 친정에 나서도록 할 계획이었는데 그녀가 급서해 일이 꼬였다. 경험이 일천한 휘종은 노련한 관료가 필요했고 이에 부응한 것이 채경이었다. 환관 동관은 안광이 예리한 주걱턱의 인물로 휘종을 망국의 황제로 전락시켰다. 소주의 갑부인 주충도 채경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주충과 그의 아들 주면이 강남의 각종 물자를 수도 개봉으로 공급한 주역이었다.

채경은 뛰어난 서예가였다. 소림사 등에 글씨가 남아 있을 정도로 미술에 대한 안목이 뛰어났다. 재상 채경은 신법을 부활시켰다. 철종때 폐지된 면역법을 부활시켰다.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을 집행해 대지주가 숨겨둔 토지를 찾아 추가 재원 확보에 공을 세웠다. 대지주가 타격을 받았다. 신법인 공전법(公田法)을 도입해 증세에 나섰다. 전답을 측정하는 제도를 고쳐 토지 1무(畝)가 넘는 것은 공전으로 몰수했다. 약 8퍼센트 상당의 땅을 빼앗았다. 영세 지주의 타격이 컸다.

강남의 돌, 바위, 서화 등에 탐닉한 휘종의 뜻에 맞추기 위해 백성을 쥐어짰다. 주면의 도움으로 강남의 진귀 물품을 개봉으로 대량으로 옮겼다. 이를 화석강(花石綱)이라고 한다. 휘종은 도교에 깊이 빠졌다. 절강성 온주 출신의 도사 임영소가 크게 신임을 받아 통진달영선생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에게 도교의 교리를 궁중에서 강론케 했다. 도교 의식인 천도회(天道會)를 열어 많은 재정이 소진되었다.

왕안석과는 달리 채경의 시책은 휘종의 개인 사치와 신법당의 권력 강화에 목적이 있었다. 차와 소금의 전매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화했다. 차, 소금의 전매 증서를 마음대로 조작해 사복을 채웠다. 당십전(當十錢)이라는 질 낮은 화폐를 유통시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다. 도교 의식을 위한 건축물과 각종 궁전의 조성을 위해 엄청난 토목사업을 벌였다. 수도 개봉의 건축붐으로 엄청난 재목이 필요했다. 전국의 산림 훼손이 불가피했다. 인접한 산서성에서만 40만주의 재목이 200척 이상의 배로 개봉으로 운송되었다.

요나라와 금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크게 뒤틀렸다. 1120년 금과 새로운 동맹을 세웠다. 연운 16주 탈환을 목표로 요나라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었는데 1125년 비밀문서가 발견되었다. 금의 태종은 이에 분노해 개봉을 공격했다. 연경을 방어한 곽약사가 금에 투항했다. 휘종이 퇴위하고 장남이 흠종으로 즉위했다. 채경은 국난을 초래한 육적(六賊)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해남도를 거쳐 호남성 장사로 유배되고 병사했다.

채경은 반대파인 구법당을 철저히 탄압했다. 원우당적비(元祐?籍碑)를 만들어 319명의 명단을 기록했다. 전국에 300개 이상을 세웠다.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이 망국을 가져왔는데 원우당적비는 그 백미라 할 수 있다.

철종때 재상 사마광의 명에 따라 면역법을 신속히 폐기했다. 개봉자사로 있었던 채경은 자신의 생각을 신속히 바꾸어 5일만에 제도를 갈아치웠다. 채경의 신속한 행동으로 “전국의 장관들이 모두 채경과 같다면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양주 자사로 재직 중 어느 여름 8인의 손님을 초청해 찬 음식을 접대했다. 우연찮게 이곳을 방문한 고관들이 방문해 연회객이 무려 40명으로 늘어났다. 채경은 순식간에 40명분의 음식을 장만해 그들을 대접했다. 그의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는 일화다.

“지난 날을 돌아보니 영화가 모두 허무하네. 이제와 돌아보니 한바탕 꿈이더라.” 채경이 담주로 유배갈 때 노래한 시의 한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