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224> 여혜경, 북송 정치인…신법 개혁 실무 주역
2020년 03월 17일(화) 00:00
<초당대총장>
여혜경(呂惠卿, 1032~1112)의 자는 길보(吉甫)로 복건성 천주 남안 사람이다. 북송 신종, 철종, 휘종 때의 정치인이다.

인종 가우 2년(1057) 진사시에 합격했다. 진주 추관을 거쳐 수도로 돌아와 왕안석과 인연을 맺었다. 서로 정치이념이 부합해 평생지기가 되었다. 신종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만들고 왕안석을 기용해 신법 개혁에 나섰다. 왕안석은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추천했다. “여혜경의 재능이 어찌 현세대 사람들에게만 출중하겠습니까. 선왕의 도리를 배워 쓸 수 있는 자는 여혜경 뿐입니다.” 신법의 주요 내용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갔다. 신법당의 핵심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왕안석을 공자로 여혜경을 공자의 수제자인 안연으로 불렀다. 한강 여혜경 증포 여가문 장돈이 왕안석을 보좌한 5인이었다.

희녕 2년(1069)부터 7년(1074)까지 그는 삼사조례사, 사농사, 국자감을 거쳐 지간원, 지제고, 한림학사를 역임했다. 이어 부재상인 참지정사에 올랐다. 왕안석의 아들 왕방과 함께 왕안석의 삼경신의(三經新義)를 편찬하였다. 구법당을 이끈 사마광은 그에게 특히 비판적이었다. 신종에게 말하기를 “여혜경은 간사하다. 변법에 관한 책략을 꾸미고 왕안석을 통해 이를 시행하려 하니 세상 사람들이 왕안석 또한 간신이라 여긴다” 신종은 “그가 올리는 대책은 조리가 분명하고 재능이 뛰어나다”며 옹호했다.

1074년 왕안석이 중앙을 떠나며 참지정사로 추천했다. 한강과 여혜경은 “신법을 전하는 도사”로 불렸지만 사실상 그가 반대편의 공격과 비판을 몸으로 막아냈다. 반대파인 정협은 상소를 올려 공격했다. 동년 수실법을 제정해 백성들의 재산을 일제조사토록 해 면역전의 균등한 납입을 제도화하고자 하였다. 조정의 갈등이 심해지자 1075년 2월 왕안석이 다시 재상으로 복귀했다. 이를 계기로 둘 사이 관계가 예전과 같지 못했다. 한강은 왕안석과 틀어져 관직을 그만두었다. 신종이 왕안석과 다투는 이유를 묻자 “왕안석이 그 자리에서 편하지 않은 것은 신 때문입니다.” 결국 동년 10월 파면되어 진주지주로 나갔다.

1082년 모친상을 치른 후 태학사, 지태원부의 관직에 올랐다. 신종이 섬서 지방을 잘 지킬 것을 명하자 “섬서의 군사는 공격도 방어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그저 형세에 의존한다”고 변명하였다. 화가 난 신종이 “섬서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인데 어찌 그대에게 맡기겠는가”라며 단주로 좌천시켰다.

1085년 철종이 즉위하자 구법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를 신법의 중심으로 몰아 탄핵하였다. 건영군절도부사로 좌천되었다. 섭정을 하던 고태후가 죽자 철종이 친정에 나섰고 신법당이 재기했다. 1094년 복직되었다. 중앙으로 복직되기를 희망했으나 황제가 가납치 않아 지방에서 근무했다. 휘종이 즉위한 후 진남을 담당했다. 신법당의 장돈, 증포, 채경 등은 그의 간악한 성품을 싫어해 중앙으로 복귀하는 것을 탐탐치 않게 여겼다. 결국 지방을 전전하다가 1112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신법 개혁의 실무 주역이었다. 신종 초 균수법, 청묘법, 시역법, 면역법 등의 법령을 직접 만들었다. 그러나 욕심이 많고 권력욕이 강해 왕안석과 갈등이 깊어졌다. 왕안석이 재상에서 물러난 연후에는 그를 공격했고 개인 서신까지 공개해 헐뜯었다. 왕안석은 그를 깊이 신임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왕안석의 동생인 왕안국은 그를 ‘아첨꾼’으로 간주했다. 왕안석은 ‘가장 친밀한 전우’로 생각하고 전적으로 신임했고 부재상인 참지정사로 추천하였다. 사마광은 왕안석에게 서신을 보내 “아첨하는 무리는 지금 공의 마음에 들게 온갖 일을 다하지만 일단 세를 잃으면 반드시 공을 팔아먹을 것이다”라며 그를 경계할 것을 권했다. 왕안석이 재상으로 복귀한 후에는 왕안석이 유학을 버리고 황제를 속이고 협박했다고 고발했다. 왕안석을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따르던 여혜경은 그를 공격하는 선봉장이 되었다. 왕안석은 강등으로 은퇴한 후 복건 출신인 여혜경을 뜻하는 복건자(福建子)라는 세글자를 반복해 쓰면서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