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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한강, 북송 정치인…왕안석과 신법 개혁 추진
2020년 03월 10일(화) 00:00
<초당대총장>
한강(韓絳, 1012~1088)의 자는 자화(子華)로 개봉 영구 출신이다. 인종, 영종, 신종때 활약한 관리다. 왕안석과 함께 신법 개혁을 추진했다.

지추밀원사, 참지정사를 역임한 중신 한억(韓億)의 셋째 아들이다. 인종 경력 2년(1042) 진사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진주통판과 지성도, 직집현원을 거쳐 개봉부추관과 호부판관을 역임했다. 한강·한유 형제는 재상 증공량과 함께 신종이 왕안석을 중용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신종이 번왕으로 있을 때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신종이 그의 주장을 칭찬할 때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이 아니라 제 친구인 왕안석의 견해입니다”라고 말해 젊은 신종에게 왕안석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다. 신종이 병약한 영종의 태자가 되자 태자서자로 기용되었다.

신종이 즉위하자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를 설치하고 왕안석을 신법개혁의 주역으로 기용했다. 농민에 대한 저리융자를 내용으로 한 청묘법을 반대한 사마광, 여공저, 소식, 소철 등의 구법당을 교체하고 신법당을 대거 발탁했다. 한강은 왕안석의 오른팔로 부재상인 참지정사가 되었다. 희녕 3년(1070) 12월 왕안석과 함께 재상에 임명되었다. 여세를 몰아 보갑법과 고역법이 실시되었다. 시역법, 청묘법 등의 시행에 따른 귀족, 왕족, 대상인들의 반발이 격렬해졌다. 결국 1073년 청묘, 고역, 보갑 등 신법 8개항에 대한 일시중단 명이 내려졌다. 왕안석은 조정을 떠나고 자신의 후임으로 한강을 추천했다. 신법이 중단되지는 않았으나 상황은 크게 변했다. 그는 왕안석의 제안에 대해 늘 적극 지지하는 입장으로 안건마다 지당가용(至當可用)이라고 찬성했다.

하나라가 국경을 침략하자 섬서와 하동의 선무사를 지냈으나 성이 연이어 함락당하고 군대가 동요하자 파직되었다. 같은 신법당인 여혜경과 자주 반목하여 왕안석의 재기용을 청하기도 했다. 한강과 여혜경은 ‘신법의 수호자’로 불리었지만 그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복귀한 왕안석과 사이가 틀어져 허주지주(許州知州)로 나갔다. 신종이 죽고 나어린 철종이 즉위하자 진강군절도사와 개봉의동삼사를 지냈다. 강국공에 봉해졌고 북경유수, 사공 등을 역임했다. 1088년 세상을 떠나자 헌숙(獻肅)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인종 황우 3년(1051) 강회와 양절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강남동지로의 체량안무사로 파견되었다. 부임하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자들을 진휼하고 백성들의 질고를 살폈다. 아전의 갑질이 심해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즉시 새로운 아전법을 상주해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세도가들이 땅, 개천 등을 사사로이 점유해 약간의 세금을 내고 이익을 독식했다. 그는 주변의 농민들에게 세금을 공평히 부담시키고 개발이익을 공유토록 조치하였다.

1063년 지성도부 때의 일화다. 사천 지방은 봄과 가을 사이 쌀값이 올랐다. 전임자가 쌀과 소금을 백성들에게 판매하고 증서를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증서가 모두 부유한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한강은 실사를 해 7000여호에게 새롭게 증서를 발급해 주었다. 3년마다 재산 상태를 점검해 증서를 갱신토록 하였다. 백성들이 질병을 앓으면 약을 지급받고 가난한 자가 죽으면 직접 장사지내 주었다. 또한 지방에 파견된 환관의 상행위를 엄격히 금지토록 영종에게 상소해 시행토록 하였다.

추밀부사가 되자 신종이 국가의 재원 확보책을 하문했다. 그는 답하기를 “재원을 확보하는데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 제일입니다.” 재차 상소문을 올려 정부 일을 하는 차역(差役)을 개선해야 폐단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결국 시역법을 개선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1074년 왕안석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시행된 신법 중 문제가 있는 제도와 등용되지 못한 인재를 널리 구하도록 노력했다. 중서성에 부서를 설치해 천하의 재정 상태를 점검해 세입에 따라 세출이 조정되도록 하였다. 사마광의 등용을 청했으나 신종은 답하기를 “내 사마광에 대해 무얼 아끼겠소이까? 그가 오히려 오려 하지 않은 것일 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