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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과 학림다방
2020년 02월 26일(수) 00:00
김미은 편집부국장·문화부장
삐그덕대는 계단을 올라 낡은 나무문을 밀고 들어섰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진한 커피 향도 함께 흐른다. 지난해 가을, 10여 년 만에 다시 와 본 이곳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낡은 탁자와 의자, 가득 꽂혀 있는 LP 디스크, 클래식 아티스트들의 흑백사진 등등.

그런데 이날은 예전과는 다른 풍경 하나를 만날 수 있었으니,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백기완 선생의 모습이었다. 그날도 백기완 하면 떠오르는, 갈기 같은 흰머리와 한복 차림이었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함께 간 친구가 백 선생은 늘 그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고 일러준다. 우리 세대에게 ‘백기완’이라는 이름은 강렬하다. 보자마자 경외감이 들었고, 연설을 하던 그 칼칼한 목소리도 생각났다. 차를 마시는 사이사이 자주 백 선생에게 눈길이 갔다. 더불어 서울에 다니러 올 때마다 이곳에서 자주 커피를 마셨던 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백 선생을 만난 곳은 서울 대학로 찻집 ‘학림다방’이다. 1956년 문을 연 이 곳은 지성인들의 사랑방이자 문화계 인사들의 단골 다방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학림다방 30년-젊은 날의 초상’전 기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백 선생 사진을 보고 그날을 떠올렸다. 1987년 학림을 인수한 이충열 씨는 중고 라이카 M6 카메라로 손님들을 찍어 왔다. 사진전에는 김민기, 고(故) 김광석, 젊은 시절의 연극배우 송강호 사진 등이 전시됐다. 이씨는 전시회 서문에서 “손님 한 분 한 분을 촬영했으면 지금쯤 우리나라 근대 인물사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광주의 기억을 저장하는 법

이달 초 광주 양림동에서 열린 ‘안녕, 은성유치원’전도 흥미로웠다. 쥬스컴퍼니 ‘양림 기억창고 프로젝트’ 두 번째 기획으로, 1975년 개원해 45년 동안 아이들과 함께한 후 몇 년 전 문을 닫은 은성유치원을 추억하는 이벤트다. 왕관 쓰고 생일잔치 하는 모습 등 졸업생들에게 기증받은 사진이 여럿 전시됐다.

내가 이 기획에 주목했던 건 ‘사라지는 것을 기억하는 일’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던져 주기 때문이었다. 전시 주인공은 특정 유치원이긴 했지만 바로 오래된 주택과 골목길, 서점, 시장, 분식점 등 지금은 사라졌고, 앞으로 사라질 우리들 ‘추억의 공간들’의 대명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떠나보내지 않고 작별 인사라도 나누는 의식을 통해 그 공간을 기억하고, 사람을 기억하는 일의 소중함을 서로 나누는 기획들이 많아졌으면 싶었다. 다행히 은성유치원 자리엔 상업시설이 아닌, ‘어른들을 위한 유치원’을 모토로 한 복합문화시설이 문을 연다. 그래서 전시 제목에 붙은 ‘안녕’은 지난 시절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며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도 보인다.

지난달 문을 연 광주계림미술관은 ‘기억이 축적된 공간’이다. 1947년 지어진 집과 가게는 네 번의 증개축 과정을 거치며 만화가게로, 자개농방으로, 중국집으로 사용되며 누군가의 생계를 책임져 왔다. 전시장은 자개농방으로 영업을 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아파트에서 주워 온 자개로 문을 만들고, 낡은 가정집 느낌 그대로 바닥도 살렸다. 미술관은 계속되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으로 사라져 가는 삶의 공간을 기억하고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문화공동체를 꿈꾸며 공간을 마련했다.

며칠 전 클래식 음악감상실 ‘베토벤’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고전음악감상동우회’의 40주년 기념 이벤트. 이날 20여 년 만에 감상회에 참석했던 한 회원은 정말 오랜만에 ‘베토벤’에 들렀다가 오랜 벗들을 만났다. 38년간, ‘늘 그 자리에’ 베토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림’이나 ‘베토벤’처럼 처음 그 자리에서 원형의 모습을 지켜 가는 게 가장 좋겠지만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쩔 수 없이 공간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면, ‘공간이 축적해 온 기억’을 풀어놓을 수 있는 ‘또 다른 기억 저장소’가 필요하지 않을까. 아파트공화국이 되어 가는 요즘의 광주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보세요 건설회사 대표님들

지난해 말 기준 광주 아파트는 1125단지 41만 8546세대, 시공 중인 아파트는 57단지 2만 9594세대에 달한다. 올 초 확정된 광천동 재개발은 광주 최대 규모로 6200세대가 들어선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의 역사와 흔적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셈이기도 하다. 당장 5·18 투사회보를 제작했던, 들불야학의 역사가 서린 광천동 시민아파트 보존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건설회사 대표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단지를 조성할 때 ‘기억의 공간’을 함께 만들면 어떨까. 재개발로 사라져 가는 계림동의, 풍향동의, 광천동의 역사를 담을 수 있는 그런 장소들 말이다. 동네 주민, 문화 기획자들과 머리를 맞대 아이디어를 짜고 자료를 수집해 ‘오래전 광주’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창고들’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공간이 없으면, 시간은 어디에 기억될 것인가’. 학림다방 이충열씨의 사진집에 소설가 정찬이 쓴 서문의 제목이다.

/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