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누리대’에 젓가락이 가게 되는 까닭은
2019년 12월 31일(화) 00:00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들이 있다. 먹거리에 대한 취향도 그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음식 취향이 극적으로 변한 사례는 ‘누리대’(누룩치의 강원도 방언)에 대한 입맛의 변화이다. 누리대는 주로 강원도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산나물의 일종이다.

먹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향과 맛이 약간 비릿하면서 쌉싸름하다. 야채샐러드에 많이 쓰이는 셀러리(celery)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향과 맛이 더 강하다. 어렸을 때부터 이 나물이 밥상에 올라와도, 이런 역한 향과 맛 때문에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근래 들어 이 누리대를 떠올리면 입안에 슬그머니 침이 고인다.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혹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입맛이 변했다든가, 좋아했든 싫어했든 자식들은 어렸을 때의 어머니 음식 맛으로 언젠가는 회귀하게 되어 있다는 식의 해석이 그런 것들이다. 말을 만들자면, 마더텅(Mother tongue: 모국어)에 버금가는 ‘마더테이스트’(Mother taste: 어머니의 손맛)의 강고함인 셈이다. 그런데 어떻게 설명하든 불변의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변화는 누리대가 아니라 내가 변한 결과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뜬금없는 철학적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을 법도 하다. 누리대를 싫어하던 예전의 나와, 그것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이는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만약 같다면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하룻밤에도 기와집 열두 채를 지었다 허물었다 하는 것이 ‘생각’이라는 놈의 속성이니 거기서 일관성을 찾기도 그렇고, 우리 ‘몸’이라는 것 또한 구성 세포가 짧게는 14일 길게는 6개월이면 전혀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고 하니, 여기서 나의 불변함을 찾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기는 마찬가지일 듯하다.

며칠 전 우리 시대의 낭만 가객 최백호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여전히 명불허전인 노래도 노래였지만 사이사이 간주처럼 풀어놓는 이야기도 그에 못지않게 여운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올해 칠십이 된 것을 자축하며 ‘7 seven’이라는 타이틀로 순회공연 중인 그는, 사주를 보니 구십여덟까지 산다고 하더라면서, 구십까지 노래를 할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서 너스레라기보다는 어떤 진정성이 느껴졌다. 자신에게 가수 생활의 중흥기를 가져다 준 ‘낭만에 대하여’를 마흔다섯에 만들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서른다섯 때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노래였다고도 했다. 그러니 팔십에는 팔십에 가야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있을 것이고 구십에는 또 그 나이에 도달해야 나올 수 있는 노래가 있을 터이니, 구십까지 노래하는 것이 뭐 어려울 게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공감이 가고도 남는다. 누리대 무침에 슬며시 젓가락이 가리라고는, 나 역시 오십 줄까지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최백호’라는 변치 않는 개성이 있어 이십대에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작곡하고, 사십대에 또 ‘낭만에 대하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노래들이 이십대의 ‘최백호’와 사십대의 ‘최백호’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성싶다. ‘내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 것이 나’라는 오래된 가르침이 떠올려지는 대목이다.

언제부턴가 청춘들이 너무 쉽게 삶을 버린다. 특히 같은 또래에게 영향력이 큰 젊은 연예인들의 극단적 선택들이 잊힐 만하면 뉴스를 탄다. 세밑이 되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 해를 반추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올해에는 이 때문에 그 돌아봄의 결이 많이 다르다. 우리 사회의 청춘들이 스스로 삶을 저버리는 일들이 그냥 혀 한 번 차고 말던 예전과 다르게, 마음에 체기(滯氣)를 이루는 경우가 잦아서이다.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고, 내 아이들이 비슷한 연배를 살고 있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그들의 그런 선택을 방관해 온 ‘꼰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싸구려 감성팔이일 망정 미안한 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 때는 말이야’라는 식의 잔소리로 들릴지라도, 그들에게 이런 말은 꼭 하고 싶다. 자신을 상수(常數)로 여기지 말라고. 상수인 삶은 없다.

삶은 언제나 변수(變數)일 뿐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지 몰라도 그 세상을 보는 삶들이 바뀌고, 그러면 마술처럼 요지부동일 듯싶던 세상도 종내는 바뀐다. 그러니까 부디 지금의 상황을 고정시켜 절대시하고 조급해 하거나 낙담하지 말기를 권한다.

‘오리-토끼 그림’에 정답이 없듯이, 누구에게나 모든 세대에게나 똑같이 보이는 세상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