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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 생각’] 도시에는 나무가 많지만…
2019년 11월 28일(목) 04:50
도시에는 나무가 많다. 나무보다 큰 건축물과 조형물이 많은 까닭에 나무의 존재감은 크지 않지만, 도시의 빌딩 숲에도 나무는 많이 살아 있다. 단위면적당 개체 수를 헤아리자면 산과 들이 넓은 시골에 비해 나무의 절대량은 적다. 그러나 적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가로수는 물론이고, 도심의 아파트를 비롯한 건축물 주변과 근린공원에 심어 키우는 나무의 숫자와 종류는 생각보다 많고 다양하다.

나무를 베어 내고, 아스팔트 도로를 내고, 콘크리트 빌딩을 지은 사람들은 바로 그 자리에 나무를 심는다. 보기 좋은 나무를 골라서, 보기 좋은 자리에, 보기 좋은 순서로 많이 심는다. 대형 건축물의 경우 일정량의 나무를 심어 조경을 완성하지 않으면 건축물 허가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자라던 나무를 뽑아내고 사람의 터전을 닦은 도시에는 새로운 나무를 들여와 심어야 한다. 가능하면 값비싼 고급 조경수를 심는다. 그래서 저절로 자라는 나무들이 많은 시골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의 나무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도시다.

대로에는 공기 정화 기능이 탁월하고 미관을 화려하게 하는 나무를 가로수로 심고, 빌딩 곁에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최고급 조경수를 심는다. 빌딩의 값어치를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비슷한 종류의 나무들이 자생하는 시골에 비해 훨씬 다양한 나무가 도시에서 자란다. 이런 까닭에 개체 수는 적지만 종류는, 웬만한 시골이나 깊은 숲에 비해 훨씬 다양할 수밖에 없다. 소나무·느티나무·은행나무처럼 우리나라의 대표 수종은 물론이고, 히말라야시다에서 플라타너스나 마로니에 등 원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나무들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나무를 살갑게 느끼는 도시인들이 많지 않은 까닭에 나무의 존재감은 현저히 떨어진다.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곧 나무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된다. 도시에서 나무의 존재감이 언제 도드라지게 드러나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단풍이 울긋불긋 물든 가을이나 화려한 꽃이 도시를 밝히는 봄에는, 누구라도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 곁에 머무르게 된다. 도시가 미세먼지로 뒤덮일 때에도 사람들은 나무를 더 심어 미세먼지를 정화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나 나무의 존재감이 더 도드라지는 때는 따로 있다. 울울창창하게 자란 나뭇가지가 거리의 신호등이나 이정표 또는 상가의 간판을 가리는 때, 자연스러운 생식 과정의 결과로 숱하게 많은 열매를 떨어뜨려 고약한 냄새를 풍길 때다. 대개는 나무의 존재 자체를 성가시게 느낄 때, 사람들은 나무의 존재감을 체감하는 편이다. 도시인들은 가차 없이 나무를 베어 내거나 암수를 분리시켜 수억 년 동안 이어 온 나무의 생식 과정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결국 도시에 나무가 많기는 하지만, 나무를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 내느냐는 따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최근 지자체마다 앞다퉈 진행하는 자기 지역 안의 나무 답사 프로그램이 눈길을 끄는 건 그래서다. 지역민을 대상으로 거리의 가로수와 근린공원을 비롯해 도심의 낮은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을 샅샅이 살펴보고 생태와 인문학적 의미를 짚어보는 프로그램이다. 우리 곁에 살아 있는 나무의 실체를 알아보고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생명체로서의 나무를 바로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에 대한 애정을 가지는 기회도 된다. 일거양득의 효과다.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는 그의 책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에서 ‘도시는 인간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전제하고, ‘대자연의 고요보다는 도시의 압박과 소음’이 자기 삶을 돌아볼 더 좋은 상황이라고 했다. 공해와 매연, 도시의 압박과 소음은 오히려 나무의 존재감을 더 잘 느끼고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조건이라는 일갈이다.

이는 사람이 나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걸 느끼기에는 도시가 더 유리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시의 나무를 바라보는 건 결국 에릭 호퍼의 이야기처럼 도시의 사람살이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더 높이는 일임에 틀림없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