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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204> 구준
북송 태종·진종때 강직한 충신
2019년 10월 29일(화) 04:50
구준(寇準, 961~1023)의 자는 중평(中平)이며 현 섬서성 위남에 해당하는 화주 하방 출신이다. 태종, 진종 때의 명신이다.

태평흥국 5년 (980년) 진사에 합격했다. 귀주 파동과 성안의 지현에 임명되었다. 989년 태종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태종이 화를 내고 내궁으로 들어가려하자 황제의 옷자락을 잡고 끝까지 들어줄 것을 간청했다. 태종은 “내가 구준을 얻은 것은 당태종이 위징을 얻은 것과 같다”고 극찬했다. 991년 큰 가뭄이 발생했다. 태종은 중신들과 논의했는데 대부분 천수를 탓했으나 그는 “큰 가뭄은 형벌이 불공평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태종이 그 의미를 물었다. 답하기를 “조길과 왕희가 뇌물을 받았는데 조길은 적게 받았으나 사형에 처해졌고 왕희는 참지정사 왕면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장형에 처해졌습니다.” 이후 부재상인 참지정사에 발탁되었다.

태종은 황태자 책봉을 머뭇거렸다. 구준에게 후사 문제를 상의했다. 답하기를 “오직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자를 골라 세워야합니다.” 황제는 양왕이 어떠냐고 묻자 “부모만큼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결정하시는 것이 옳습니다.”고 답했다. 양왕 조왕이 3대 진종이 되었다. 신임이 깊어져 무소뿔을 두 개 허리띠로 만들어 하나는 자신이 차고 하나는 구준에게 하사했다.

997년 진종이 즉위했다. 치세 초기 현안은 요나라와의 갈등이었다. 999년 요군이 고양관에서 송군을 대파했다. 1003년 재차 침입해 송군의 양계충을 포로로 잡는 등 크게 압박했다. 1004년 요의 성종이 20만 대군을 몰고 남하했다. 진종은 구준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참지정사 왕흠약은 금릉으로 진요수는 성도로 파천할 것을 청하였다. 구준은 단호하게 반대하며 황제의 친정을 요청하였다. “황제를 위해 이런 헌책을 한 것이 누구인가. 주살감이다. 이제 폐하께서 친정하면 적은 마땅히 자진 후퇴할 것이다.” 진종이 친정해 양측은 전연에서 대치했다. 구준은 요가 유주와 계주를 넘기고 스스로 신이라 칭할 것 등 강경론을 주장했다. 진종은 화친으로 마음이 기울어 “수십년 후라면 마땅히 방어할 자가 있을 것이다. 과인은 모든 백성의 어려움을 참을 수 없다.” 결국 전연의 맹약이 체결되었다.

화평파는 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전연의 맹약은 치욕이라고 진종을 설득했다. 이후 진종은 구준에게 냉담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1006년 재상에서 물러나 하남과 섬서 등에서 지방관으로 근무했다. 1019년 정위가 구준을 재상으로 복직시키는 일을 꾸몄다. 그의 명성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진종은 건강이 나빠져 정사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정위는 유황후와 함께 정사를 좌지우지했다. 그는 비밀리에 태자를 감국(監國)으로 임명해 정무를 처리하도록 계획을 세웠는데 정위 일파가 선수를 쳤다. 모반죄에 연루되어 수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1022년 뇌주로 부임하였는데 1023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1033년 인종은 중서령에 추증하였다.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요가 전연을 공격하던 때의 일화다. 상주문이 하룻밤에 다섯 통이나 올라왔지만 태연자약하게 술을 마셨다. 진종이 놀라 구준에게 하문하자 “폐하께서는 이 일의 결말을 짓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진종이 답하기를 “나라의 위급함이 이 지경인데 어찌 오래 끌고 싶겠소?” 구준은 친정만 하면 5일이 안되어 일을 결말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진종의 친정이 결정되었다.

구준이 뇌주로 좌천될 때 재상 정위는 환관을 파견해 뇌주 발령 칙령을 전달토록 하였다. 환관이 도착할 즈음 구준은 술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환관은 뇌주 관원을 피해 객사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뇌주 관원들이 두려움에 떨며 우왕좌왕했다. 구준은 태연히 말하기를 “조정에서 만일 나에게 죽음을 내렸다면 그 칙서나 보여주게나.” 구준은 조복을 빌려 입고 청사 마당에서 환관을 만났는데 옷이 적어 무릎이 나왔다. 다시 술잔치를 벌여 저녁이 되어서 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