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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다큐소설 광주 아리랑
<6> 5월 16일 ‘햇불시위’
횃불시위 대표자 50여 명은
횃불용 막대기 10여 개씩을 들고
시위행렬이 대기하고 있는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아갔다
준비했던 400여 개의
횃불용 막대기는 금세 동이 났다
2019년 10월 17일(목) 04:50
땅거미가 깔렸다. 날빛이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등산은 밤바다의 먼 섬처럼 어둠 너머로 멀어졌다. 산정 위 하늘에는 시나브로 별들이 희미하게 돋아났다. 이윽고 먹물 같은 어둠이 스멀스멀 깔려오자 시위를 주도하는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회 간부들은 바빠졌다. 횃불배급조가 대학생들에게 무명천조각을 철사로 둥그렇게 감은 막대기를 재빨리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면 횃불이 되는 각목 같은 막대기였다. 플래카드와 피켓은 각 대학에서 제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대학생들의 요구는 ‘비상계엄 철폐하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라.’ 등등이었다. 횃불보급조의 한 대학생 간부가 횃불시위를 할 대표자 50여 명에게 말했다.

“오늘밤 우리가 횃불시위를 하는 것은 박통 이후 캄캄했던 군부독재, 유신독재 18년간의 어둠을 몰아내불자는 것입니다. 의미를 알고 횃불을 든다면 더욱 신명이 날 겁니다. 횃불의 불은 절대로 밑으로 흘러내리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가 ?습니다. 다만 처음에 불이 붙을 때는 횃불을 아래로 들고 있다가 세워야 헙니다. 기름이 떨어지믄 거리 곳곳에 기름공급조가 있응께 공급받으면 됩니다.”

횃불시위 대표자 50여 명은 횃불용 막대기 10여 개씩을 들고 시위행렬이 대기하고 있는 금남로와 노동청 쪽으로 돌아갔다. 준비했던 400여 개의 횃불용 막대기는 금세 동이 났다. 횃불시위 대열은 2개조로 나누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의 한 간부가 스피커를 통해 횃불시위 코스를 알렸다.

“조선대 학생들이 앞장서는 1개조는 금남로를 지나 유동삼거리까정 가서 광주천변도로를 타고 올라와불다 현대극장서 다시 금남로로 들어와 도청 광장으로 오는 코스고, 또 전남대 학생들이 앞장서는 1개조는 노동청과 문화방송 앞 도로를 지나 광주고 앞을 거쳐 계림동 사거리에서 산수동 오거리를 통과해 도청 광장으로 오는 코스입니다. 이미 각 대학 간부들에게 코스를 설명했으니 착오 ?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의할 것은 횃불로 인한 화재사고와 안전사고입니다. 화재가 나면 누가 좋아하겄습니까? 우리들 시위를 사회혼란으로 몰고 가려는 군부세력일 겁니다. 긍께 여러분들은 일제강점기에 광주학생의거가 일어난 의로운 고장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질서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시위행렬 선두는 교수 일부가 섰다. 선두에 서지 않은 전남대 2백여 명, 조선대 1백여 명의 교수들은 바람막이처럼 학생들 옆을 따랐다. 학생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교수뿐만 아니라 고등학생, 시민들도 있었다. 14일 가두시위 때 냉담하던 태도와는 달랐다. 15일, 그러니까 어제부터는 시민들이 박수를 치고 응원하는 등 살갑게 구경하고 직접 행렬에 동참도 했다. 학생시위를 구경하던 시민들 중에는 식당 주방장, 가구점 종업원, 대입재수생, 주유소 수금원 등도 섞여 있었다.

“오메, 저것들. 황금동 가시내들이어야! 낯이 무자게 익은디.”

술집이 늘어선 황금동에서 온 낯익은 아가씨라는 말이었다. 그러자 한 시민이 말했다.

“저것들이 뭣을 안다고 그란다냐.”

“아따, 형씨 사람 차별허지 마쑈. 사정이 있응께 그라제, 누가 날 때부텀 술집여자로 태어났다요.”

“맞는 말이오. 내가 말실수를 해부렀그만잉.”

14일 전남대 학생 가두시위에 참가해 법원 앞까지 따라갔던 나명관도 노동청 쪽 학생행렬에 가담했다. 김성섭도 도청 앞으로 나온다고 했지만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동고 유석은 급우들 40여 명과 함께 전남대 학생들 사이에 끼었다. 유석은 횃불이 여기저기서 불타오르자 가슴이 마구 뛰었다. 김성섭은 횃불을 든 학생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인자 뭔가 되가는 모냥이네.’

옆에 까치발을 하고 있던 노동자 행색의 시민들이 얘기를 나누었다. 김성섭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그저껜가는 학생들이 경찰봉급을 올려주라는 구호를 외치대야.”

“조대 정문 앞에서는 학생들이 전경들에게 빵허고 우유를 나눠 주드그만.”

“따지고 보믄 다 성, 동상 같은디 디져라고 싸울 이유가 ?제잉.”

“학생들 얘기를 듣고 봉께 전두환이가 진짜 독사 대가리여, 최규하는 물러터진 봉이고.”

경찰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분명했다. 작년만 해도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면 최루탄을 쏘아대며 강경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 간부를 현장에서 체포했고, 구호를 외치거나 플래카드를 든 학생들을 반드시 연행해 갔는데, 14일부터 경찰의 태도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래서 시위학생들 간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질서유지조였다. 질서유지조는 집회할 때 이견이 노출되고,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면 어김없이 “질서 유지!”를 반복해서 복창했다. 김성섭은 학생과 경찰들이 서로 수고한다는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는 또 다시 중얼거렸다.

‘세상 참 많이 좋아져부렀네.’

횃불시위 행렬은 30여 분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도청 분수대를 출발했다. 광주공원 너머 푸르스름한 하늘에는 초사흘 여문 초승달이 선명했다. 마치 예리한 칼로 오려낸 듯 치켜 올라간 눈썹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송기숙 교수는 흰 교복을 입은 여고생의 무리를 보고는 가슴이 벅차올라 탄성을 내질렀다.

“니들이 희망이다!”

“송 교수님, 딸 같은 여고생들을 보니 가슴이 참 뿌듯해져붑니다.”

“박 교수님, 여고생들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가 암흑을 밝히는 인간 횃불 같아부요.”

“아! 역시 작가다우십니다.”

“나는 저 광주천 너메 초승달만 봐도 가슴이 먹먹허요.”

“어째서요?”

“몇 해 전 ‘녹두장군’을 쓸 때 내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전봉준의 눈이었어라. 분노에 찬 눈 말이요. 글이 안 써질 때마다 그 형형한 눈빛을 떠올렸지라.”

“시민들 모습에서 전봉준을 본다는 말인가요?”

“아니요, 저 초승달이 전봉준의 눈 같으요. 오늘은 저 초승달이 분노에 떠는 것 같그만요.”

‘녹두장군’을 구입하여 작가의 친필서명을 받아 보관하고 있는 박 교수는 송기숙 교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검푸른 하늘에 또렷하게 박힌 초승달이 전봉준의 이글거리는 눈초리처럼 보였다.

박 교수는 잠시 ‘녹두장군’에 등장하는 고부지방의 동학 접주(接主) 전봉준을 떠올렸다. 동학에 입교한 전봉준은 왜 ‘크게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차라리 멸족당하고 말겠다.’라고 말하고 다녔을까.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치도곤을 당하고 장독이 올라 한 달 만에 죽은 아버지 전창혁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전봉준은 자신의 한을 사회개혁의 힘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송 교수님,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 됐겄습니까?”

“박 교수님 생각은요?”

“산적이나 역도(逆徒)가 됐을 것 같습니다.”

“그랬을지도 모른디 동학 이념이 전봉준을 민초들의 녹두장군으로 만든 겁니다.”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를 닦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이룬다는 동학 이념 말이군요.”

“박 교수님이 정확하게 짚으신 겁니다.”

“한심하지라. 유신독재 무리들이 경천수심이 뭔지, 보국안민이 뭔지 알기나 허겄습니까?”

“그래서 ‘녹두장군’을 쓰셨그만요.”

“안 팔리는 책 쓰면 뭣합니까? 오늘밤 횃불시위보다 감동을 주지 못헌 소설나부랭이 같은께 허는 말입니다.”

박 교수가 입을 다물었다. 수십 개의 횃불이 캄캄한 밤을 밝히고 있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앞장서고 있는 횃불시위 조는 어느 새 계림동 사거리에서 산수동 오거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동고생 유석은 급우들이 다 떨어져 나간 채 친구 송을령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밤이 깊어져 있음을 문득 느꼈다. 교내 독서회 회원인 김용필과 김향현도 보이지 않았다. 도청에서 출발할 때는 옆에 있었는데 어느 시위행렬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유석은 송응령에게 말했다.

“응령아, 시위를 마치고 집으로 갈래?”

“니는?”

“전남대 형들이 학교로 돌아가 농성을 헌다는디 나는 거그로 갈란다.”

“니가 간다면 나도 가볼란다.”

“그래, 형들이 뭔 얘기를 허는지 들어보자.”

두 학생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대학생들이 부르는 훌라송을 따라했다. 훌라송은 유행가처럼 고등학교까지 퍼져 고교생들도 잘 불렀다. 노래를 따라하면 흥이 나서 발걸음이 절로 가벼워졌다.



비상계엄 철폐하라 훌라 훌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훌라 훌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 훌라



훌라송은 상여꾼의 상여소리처럼 비장하지만 무겁지 않고 리드미컬했다. 시위구호에 ‘훌라 훌라’만 붙이면 훌라송이 되었다.



노동인권 보장하라 훌라 훌라

농민수탈 중지하라 훌라 훌라

경찰봉급 올려 달라 훌라 훌라

평화시위 막지 말라 훌라 훌라



개사한 훌라송은 혼잡한 곳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들을 웃게 했다. 서로 수고한다며 농담을 주고받게 했다.

이윽고 전남대가 앞장선 횃불시위 행렬이 도청 앞에 이르자, 금남로를 따라 떠났던 조선대가 선도한 횃불시위 행렬도 가톨릭센타 앞을 이미 지나고 있었다. 두 횃불시위 행렬이 거의 동시에 도청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셈이었다. 시계탑의 시계는 오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연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학생회 간부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횃불시위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도청 앞 분수대를 향해 다가왔다. 고등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직장에서 퇴근한 시민들이 합류하여 횃불시위 참가자는 출발할 때보다 더 많았다.

횃불시위 학생들이 횃불수거조를 찾아 바로바로 반납했다. 둥그런 분수대 주위에는 50여 개의 횃불만 활활 타올랐다. 학생들은 분수대 주위에 빙 둘러앉아 평화로웠던 횃불시위를 아쉬워했다. 시민들에게 박수를 받고, 오랜 만에 시민과 하나 된 쾌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학생 누군가가 제안했다.

“여러분, 수고하신 경찰 분들에게 박수 한 번 보내붑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학생이 또 말했다.

“여러분, 박수만 가지고 되겄습니까? 성금을 모아 수고하신 경찰들 분께 드립시다.”

즉석에서 모금을 시작했다. 모금 자루가 분수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순식간에 15만원이 모아졌다.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로금은 전남경찰국 경비계장에게 전달됐다.

이윽고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분수대 위로 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민주학생 여러분, 애국시민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밤 횃불시위는 이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누군가가 박관현의 목소리에 반한 듯 말했다.

“저런 사람이 정치를 해야 허는디!”

박관현은 목이 잠겨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곧 귀국하시면, 정부에선 정치일정을 소상히 밝히고, 우리의 민주회복운동에 부응하는 반응을 즉각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에 희망을 걸고, 민주학생 여러분과 애국시민 여러분, 참고 기다려 봅시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납득이 안 가는 결과가 생길 것을 대비하여, 대학생 여러분은 19일 월요일에 일단 도청 앞 광장으로 나와 주실 것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내일 토요일은 시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내일 무슨 일이 발생하면 전남대생들은 오전 10시까지 학교로 모입시다.”

교수들은 민주성회가 무사히 끝나자 안도했다. 그러나 전남대 학생 일부는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듯 어제와 같이 학생회관으로 돌아가 철야농성을 하려고 준비했다. 이는 횃불시위가 있기 전부터 학생들에게 이미 고지한 철야농성이었다. 1백여 명의 전남대생들은 귀가하지 않고 학교로 돌아갔다. 유석도 송을령과 함께 전남대생들을 따라갔다.

분수대를 밝히던 횃불이 일제히 꺼졌다. 그러자 횃불을 대신하듯 어둔 밤하늘에 별들이 한 가득 반짝였다. 밤하늘의 경이로운 신비였다. 좀 전까지 승천할 기세로 타오르던 횃불이 별이 된 듯했다. 시위학생과 시민들의 염원이 밤하늘에 별빛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누군가가 황홀해 하며 외쳤다.

“쩌어그 무등산을 봐!”

광대무변한 밤하늘의 별들이 듬직한 아버지 어깨 같은 무등산 산등성이에 직하하는 장대비처럼 마구 쏟아져 내릴 듯 보였다. 아기주먹만 한 별들이 크고 선명하게 또록또록 반짝거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