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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초당대총장>
<202> 이항
송 태종과 진종때의 명신
2019년 10월 15일(화) 04:50
이항(李沆, 947~1004)은 현재 허베이성 한단시 페이샹현에 해당하는 명주 비향 출신이다. 자는 태초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송 태종과 진종때의 명신이다.

이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말이 적고 도량이 컸다. 태평흥국 5년(980) 진사 갑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갔다.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우찬선대부와 사서편찬직인 저작랑에 임명되었다. 986년에는 우보궐과 지제고에 기용되었다. 태종은 988년 그를 방원외랑으로 승진시켜 한림학사로 임용했다. 991년 태종은 그의 학문과 경륜을 높이 사 품위 있고 단정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동년 9월 급사중으로 승진해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발탁됐다. 993년 모친상을 치른 후 하남성 지부를 지냈다. 995년 태종은 진왕 이항을 태자로 삼고 그를 예부시랑에 임명했다. 이지와 함께 태자빈객이 되었다. 997년 태자가 진종으로 즉위하자 호부시랑으로 임명되었다. 998년 태종실록 편찬작업에 참여해 50권 실록을 완성했다. 999년 중서시랑에 임명되었다. 요나라의 성종이 송나라 토벌을 선언하자 진종이 직접 북벌에 나섰고 그를 수도 개봉을 지키는 유수에 임명했다. 1000년 진종이 귀경하자 교외에서 직접 영접했다. 문하시랑과 상서우복야의 관직이 주어졌다. 1004년 7월 병을 얻자 진종이 어의를 보내 진찰토록 하고 직접 찾아가 위문하였다. 같은 달 58세로 개봉에서 사망했다.

직위와 직분에 맞는 인재 기용을 인사의 기본원칙으로 신봉했다. 불편부당한 인사를 추구했으며 붕당이나 당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진종은 틈틈이 그에게 국정을 자문 받았는데 “치국의 제일 도리는 겉치레만 있고 경박한 인물을 기용하지 않는 것이 우선되는 것입니다.”고 건의하였다. 어떠한 인물이 이에 해당하느냐는 하문에 매순, 증치요 등이 그러한 소인이라고 응답했다. 후일 증치요가 섬서성의 온중서를 보좌하자 이를 못마땅히 여겨 증치요를 파직하고 다른 관료로 하여금 온중서를 보좌토록 하였다. 진종이 소인배들이 당파를 결성해 정치를 문란케하고 간신을 구별하기가 어렵다고 하문했다. 그는 답하기를 “간신들의 언사가 충성스럽고 믿을만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당나라 재상 노기가 덕종을 기만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진종이 답하기를 “간신은 말로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노기는 덕종때의 관리로 양세법을 도입한 재상 양염을 모함해 사사케한 당왕조의 대표적 간신이었다.

북방을 장악한 요와의 국경 분쟁으로 북송은 안보상 늘 취약했다. 요의 성종은 송 정벌 전쟁에 나섰다. 남송은 재상 구준의 강경론과 참지정사 왕흠약의 온건론이 크게 대립했다. 왕흠약은 금릉으로 진요수는 성도로 파천할 것을 청하였다. 결국 구준의 건의에 따라 진종의 친정이 이루어졌다. 그는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수도를 지키는 유수 역할을 맡았다. 마치 당태종의 요동 정벌시 재상 방현령이 수도 장안을 지킨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 결국 1004년 요와 전연의 맹을 맺어 이후 40여년간 화평을 이룰 수 있었다.

당항족(當項族)과의 국경 분쟁도 중대한 국가 현안이었다. 송나라 초기 당항과 송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송태종이 북한을 정벌할 때 당항도 출병해 송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후 송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세력이 득세했고 그 중심에 이계천이 있었다. 이계천은 요의 의성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하국왕에 봉해졌다. 당항의 고토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군사 요지인 간쑤성 영주를 장악했다. 진종은 조정에 당항에 대한 대책을 하문했다. 이항은 요새를 비워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했다. 조정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영주는 결국 당항의 손에 들어갔다. 전연의 맹이 맺어지자 당항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송의 동맹군인 토번과 회흘과의 싸움으로 당항도 지쳐있었다. 이계천의 아들 이덕명을 송의 정난군절도사와 태평왕에 봉했다. 이항은 사후 태위와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하동선생집이 남아있다. 남송 이종 2년 소훈각 24공신의 한명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