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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구의 중국 인물이야기 <198> 범질
오대 후주부터 북송 초기까지 재상 역임
2019년 09월 16일(월) 18:49
 범질(范質, 911~964)의 자는 문소이며 현 하북성 형태시 위현에 해당하는 대명종성 출신이다. 오대 후주부터 북송 초기까지 재상을 역임했다. 북송 초기 정치 안정에 기여했다.
 부친 범수이는 하남성 정주방어판관을 역임했다. 범질이 태어난 날 저녁 무렵 모친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신선을 만나 오색 붓을 받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글 읽는 것을 즐겨하고 박학다식했다. 9살에 이미 시문에 능했으며 13살에 시경을 학습했다. 후당 장흥 4년(933) 진사에 급제했고 충무군절도사추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진해 관직이 호부시랑에 이르렀다. 석경당이 936년 후진을 건국해 도읍을 낙양에서 개봉으로 천도했다. 석경당의 신임이 두터운 재상 상유한에게 글을 올리자 기뻐하며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려 감사어사로 봉하였다. 상유한이 재상을 물러나 상주로 부임해 태령절도사, 진창절도사로 임명되자 그를 보좌하는 종사관이 되었다. 상유한이 재차 재상으로 기용되자 주객원외랑, 직사관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한림학사에 임명되고 비부랑중, 지제고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석경당이 죽자 제왕 석중귀가 뒤를 이었다. 대거란 강경론자인 경연광이 권력을 잡았다. 경연광은 거란에 보내는 문서에 신이라 칭하지도 않고 거란을 능멸하였다. 거란은 946년 대군을 몰고 남하해 수도 개봉을 공격했다. 황제 석중귀는 유지원 등 15명의 장군을 출정시켰다. 범질이 궁중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데 황제는 여러 학사들을 불러 초조령(草詔令)을 작성토록 명하였다. 범질이 답하기를 “궁이 이미 폐쇄되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을 부르면 기밀이 유출될까 두렵습니다.” 스스로 초조령을 작성해 황제에게 보냈는데 문장의 뜻이 분명하고 앞뒤가 잘 맞아 크게 칭찬을 받았다.
 951년 후한의 장군 곽위가 후한을 멸하고 후주를 세웠다. 곽위는 그에게 중서시랑, 평장사, 집현전 대학사를 제수했다. 이어서 좌복사, 문하시랑, 평장사, 감수국사로 승진했다. 후주의 세종 시영을 따라 회남 정벌에 참여했는데 조령(詔令)의 대부분을 그가 작성했다. 세종의 측근 두의가 일을 잘못해 처벌을 받게 되었다. 범질이 눈물을 흘리며 “두의는 근신인 까닭에 작은 잘못으로 인해 죽여서는 안된다”고 간청했다. 그 덕에 두의는 처벌을 면하였다. 957년 세종의 명을 받아 형벌 법규를 손보는 작업에 착수했다. 유명한 형통(刑統)으로 북송 형법의 기본이 되었다. 당나라의 율(律)과 율소(律疏)를 토대로 송의 제도와 부합되도록 손질하였다. 명례, 위금, 직제, 호혼 등 12개 율로 구성되었다.
 959년 세종이 유주 정벌을 앞두고 급사했다. 향년 37세로 아들인 시종훈은 7세에 불과했다. 조광의, 조보 등이 모의해 금군의 수장 조광윤을 새 황제로 옹립했다. 소위 진교병변(陳橋兵變)이다. 그는 조광윤에게 “선제 세종께서 당신을 아들처럼 대해 주셨는데 지금 그의 유해가 식지도 않은 상태로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했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인식했다. 결국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특히 “태후를 어머니처럼 섬기시고 어린 군주를 아들처럼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제의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태조 조광윤은 그를 계속 재상에 기용했다.
 태조에게 황제의 동생인 태평군절도사 조광의와 가주방어사 조광미의 재주를 높이 사 봉책을 내려 작위를 하사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단명전학사 여여경, 추밀부사 조보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정통하고 충성심이 있으니 요직을 맡길 것을 건의했다. 963년 대례사에 임명되어 제사 제도의 기틀을 잡았다. 964년 정월 관직을 사임하고 태자태부에 제수되었다. 9월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 아들 범욱에게 조정에 시호를 요청하지 말고, 묘비는 새기지 말도록 당부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하루 조회를 쉬고 중서령에 추증하였다. 비단 5백 필과 곡물을 하사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청렴하고 강직해 사람들의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또한 녹봉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다. 사후 집에 남아있는 돈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