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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서유진과 5월 운동
2019년 05월 21일(화) 00:00
지금은 별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되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는 ‘5월 운동’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1980년 5월, 열흘간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진행된 시민들의 투쟁을 당시 신군부와 언론은 ‘광주사태’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한 반대 개념은 ‘광주민중항쟁’이었다. 두 가지 모두 1980년 5월의 사건을 지칭한다. 그 시민항쟁이 철저한 탄압에 의해 막을 내린 후, 민주화를 염원했던 사람들은 해마다 5월이 오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와 함께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것이 결국 6월 항쟁을 이끌어 냈다. 제1차 민주주의 이행이 이루어진 1988년 4월에 이르러 5·18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지칭되었다.

그러나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들의 요구는 종식되지 않고 더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1994년 이른바 ‘광주 문제 해결 5원칙’이라는 한국형 민주주의 이행기 정의를 정립했고, 이에 기초하여 1995년 ‘광주특별법’이 만들어졌으며, 1997년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이런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줄기찬 투쟁은 제2차 민주주의 이행과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만들어 낸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1981년부터 1997년까지, 또는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5월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민주주의를 향한 집합적 노력을 ‘5월 운동’이라고 부른다. 5월 운동은 진실, 책임, 배상, 명예, 기억을 핵심적 가치로 하고 있다. 한데 1990년대 초반부터는 그 가치를 세계화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5·18관련 단체와 시민단체들이 주축이었다.

서유진은 1993년, 50대 초반의 나이로 광주에 왔고, 5·18의 세계화라는 과제를 짊어지고 다시 아시아로 나간 5월 운동의 핵심 실천가이다. 1970년대 초반, 젊은이였던 그는 미국으로 가서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즈음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으며, 5·18의 가치에 매료되어 광주를 찾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었으며, 광주를 고향 삼았다. 그는 ‘광주시민연대’와 홍콩 아시아인권위원회의 네트워크를 따라 1990년대 후반부터 동티모르, 캄보디아, 스리랑카,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등지에서 젊은이들에게 광주의 5·18과 5월 운동의 경험을 알리고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내전과 가난, 그리고 희망이 그의 화두였다. 광주의 경험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역설했다.

1999년 크리스마스에 프놈펜에서 활동하는 그를 찾았을 때, 하루 5달러짜리 허름한 숙소에서 샌드위치 하나로 살고 있었다. 내전이 남긴 상처를 보듬고 살았지만, 항상 유쾌했고 거침이 없었다. 작년 연말, 19년 만에 캄보디아에 있는 그를 다시 찾았을 때 남부의 조그만 어항, 켑에서 한 달 200달러짜리 단칸방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연금 600달러로는 여기가 최적지라고 말했다. 중고 오토바이 한 대가 그의 전 재산이었다. 시간 날 때마다 그는 친구들을 걱정했고 광주를 그리워했다.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그는 지난 4월 광주로 돌아와 몸을 추슬렀는데, DMZ에서 진행된 인간 띠 잇기 행사에 20만 명이 참여한 것을 무척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엊그제, 5·18 전야제가 끝난 바로 그 시각에 그의 부음을 들었다. 일순간 숨이 멎었다. 가장 존경하고 또 좋아했던 선배, 항상 든든하면서도 ‘짠한’ 마음이 들던 실천가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5월 5일,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인생은 미완성이라더니, 내가 졌다. 집으로 가자”라고 썼다. 광주의 지인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캄보디아로 돌아가는 것을 말렸고 가족이 있는 미국 볼티모어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자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튿날, 그는 다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과 1932년 태국의 미완성 혁명을 언급했다.

12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제 내 사랑 켑에서 살림살이를 완전 정리하고 오후에 프놈펜으로 이동, 캄보디아를 떠날 준비가 사실상 끝났다. 음…. 왜…? 뭔가 또 요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그는 광주와의 이별을 예감한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자신이 사랑했던 것과의 이별을 고했다. 삼가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