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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농사짓던 사대부들
2019년 04월 25일(목) 00:00
정상기(鄭尙驥, 1678~1752)라는 인물이 있었다. 농사꾼이라는 뜻의 농포자(農圃子)라는 호를 썼다. 그가 이런 호를 쓴 것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그는 세조 때 영의정을 지닌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농사를 지었다. 그는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과 친구였는데, 이익 역시 농군 사대부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는 한이 있어도 호미를 잡지 않는 시대였으니 특이한 농사꾼들이었다. 이들은 보통 농사꾼이 아니었다.

하루는 정상기가 ‘향거요람’(鄕居要覽)이란 책을 쓰고는 이익에게 책의 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향거요람은 ‘향촌에서 사는 방법’이란 뜻이니 곧 농사짓는 법이다.

이익은 “내가 성호(星湖)의 농장(農莊)에서 직접 밭을 갈며 살고 있을 적에 정여일(鄭汝逸:정상기)도 적성(積城)의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익은 지금의 경기도 안산 첨성리에서 직접 농사를 지었고, 정상기는 경기도 파주의 산중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익은 ‘향거요람 서문’(鄕居要覽序)을 써 주는데, 춘추(春秋) 시대(서기전 770~서기전 221) 제(齊)나라 관중(管仲:관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관자’에 “농부의 자식은 항상 농부가 되는데, 빼어난 농민들 가운데 사(士)가 된 자는 반드시 믿을 만하다”라는 말이다. 이는 ‘관자’에 나오는 말 그대로가 아니라 ‘시경집전’(詩經集傳) ‘보전’(甫田)에 수록된 주희(朱熹)의 주석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원래는 ‘관자’ ‘광군소광’(匡君小匡) 편에 나오는 말인데 번역하면 이렇게 된다. “농부의 아들은 항상 농부가 됩니다. 꾸밈이 없고 질박하지만 사특하지 않습니다. 그중 재주가 뛰어난 자는 사(士)가 될 수 있는데, 곧 믿을 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작하면 곡식을 많이 얻을 수 있고, 벼슬에 임명하면 현명한 자가 많이 나와서 성왕(聖王)께서 농민들을 공경하고 친하게 여긴 것입니다.”

농사꾼 중에 선비가 된 인물들을 등용하면 경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호 이익은 집안이 당쟁에 휘말려 벼슬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었지만 농업을 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향거요람 서문’에서 “당대에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은 농사로 돌아가 이를 자산 삼아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식을 양육하니 그 지식이 또한 후생(後生)을 이끌고 가르치기에 충분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익은 ‘밭도랑과 이랑에서 인재를 발탁하자’는 뜻의 ‘천발견무’를 썼다. 이익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먹을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는, 극히 평범하지만 영원한 진리로 글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곡식은 소인(小人: 힘없는 백성)이 생산하니 심고 거두기의 고통은 소인만이 진실로 알 수 있다.

왕공대인(王公大人)은 지식이 넓고 생각이 깊어서 먼 일도 추측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몸이 안일한 데 있어서 보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백성들의 살을 에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다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넓은 농토를 갖고 마름에게 소작료를 걷어 오게 하면서도 자신은 직접 돈을 만지지 않는 것으로 깨끗함을 자부했다. 그래서 이익은 “반드시 벌열(閥閱)이란 하나의 칼자루를 먼저 깨뜨려 버리고 몸소 농사의 고통을 아는 자 가운데 재능과 덕망 있는 자를 가려 등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두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일은 하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여야를 막론하고 주요 공직에 발탁되어 청문회가 열리면 돈에 관련된 온갖 추문이 난무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으로 벌지 않은 돈이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의 ‘몸소 농사의 고통을 아는 자 가운데’에서 등용해야 한다는 말이 더 와닿는다.

<신한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