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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숙 연세대 문과대학 교수]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에 대하여
2019년 04월 23일(화) 00:00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건 외모적 동일성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표정, 시선, 태도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외모는 몰라보게 변했는데, 눈빛이 그대로인 경우가 있다. 반가워하는 시선, 따스한 눈빛, 살피는 시선, 무언가를 훔치려는 눈의 표정.

사람은 타인을 보는 자기 시선을 결코 볼 수 없다. 그 시선은 오직 그가 보는 상대만이 안다. 그래서 말로는 ‘네가 별로’라고 해도 표정과 눈빛으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신에 대한 상대의 감정을 알 수 있다. 오직 나를 바라보는 상대만이 그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실수하는 게 아니라 ‘고백한 사람’이 된다. ‘바라봄’은 눈과 몸으로 하는 100%의 진술이다.

포커페이스는 그래서 무표정이 아니라 감정의 표백이며 거짓말이다. 뒤늦게 제 얼굴을 찾으려 해도 이미 ‘퍼스나’(persona, 가면)가 되었기 때문에 되찾기 어렵다. 아기가 옹알이를 거쳐 말을 배우는 사회화의 과정에서 표정에 대한 피드백도 받아, 표정과 눈빛은 이미 신체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표정과 눈빛은 의사소통의 문법 구조에 포함되어 있다.

가면이 된 얼굴은 그 사람이 가면의 삶을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내용증명서다. 스스로는 감춘 것인데, 관계 속에서 그것은 타자를 경유하여, 자기진술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가면화(얼굴의 가면 되기·퍼스나의 과정)에 관여한 공조자이다.

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우리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관광 명소 같은 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면을 저마다의 카메라에 담는다. 눈으로 보고 카메라에 담고, 다시 꺼내 보지 않는다. 다시 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정성스레 밑줄 그은 책들처럼, 카메라에는 보지 않는 사진들로 가득하다.

누군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때,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만나는 나의 시선이 찍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 찍어 준 내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원치 않는 사진이 나왔을 때, 다시 찍어 달라고 부탁해 보지만, 사실은 맨 처음에 찍힌 사진이 관계의 평범한 표정이 아니었을까.

나이 들수록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말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수많은 일을 겪고 또 수많은 사람을 만난 뒤에, 얼굴이 담(淡)과 백(白), 정(靜)을 지킬 수 있게 스스로를 돌봐야 할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미셸 푸코가 ‘담론과 진실’(오트르망. 심세광·전혜리 옮김, 동녘, 2017)에서 탐구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근 저작 ‘악마는 존재한다’(디에고 마네티 엮음, 안소근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9)에서 언급된 ‘파레시아’(Parresia)는 ‘진실을 말할 용기’를 뜻한다. 원래는 ‘모든 것을 말하기’란 뜻의 그리스어로, 진솔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솔직하게 말하기, 진실을 말하기 등으로 번역된다. 말이 갖은 수단으로 임기응변을 다 해도 얼굴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있다.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진실을 말하는 거울’이 우리 앞에 있다.

얼굴이 짓는 표정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생각하려고 한다. 잘 나이 들기 위해,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모습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의 자취가 아니라, 그 눈동자에서 약탈과 지배나 비굴한 회피와 아첨의 눈빛이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고 투명하게 통과한 평온하고도 강한 에너지를 전할 수 있다면, 그/그녀는 자신의 고락을 좋은 에너지로 전환하는 노하우를 찾은 것이 분명하다.

레비나스는 ‘얼굴을 본다는 것은 세계를 말하는 것’(윤대선,‘레비나스의 타자철학’, 문예출판사, 2009. 300쪽에서 재인용)이라고 했다. 융은 ‘자기에게로 가는 길은 아주 고통스럽고 충격적이다’(‘환상 해석’,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8. 97쪽)라고 했다.

우리의 얼굴은 타인을 위해 내어 준 자신이다. 미디어의 시각 이미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없음·무위(無爲)·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아시아의 오래된 진리값에 대해 사유하면서, 타인과 나의 만남이 구성하는 시선의 풍부함, 그 마주침의 미학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 보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의 얼굴, 눈빛, 모습, 관계를 자유케 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