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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용 국회부의장] ‘여순 사건 특별법’ 제정으로 역사 바로 세워야
2019년 04월 18일(목) 00:00
여순 사건은 제주 4·3 사건과 함께 한국 전쟁 전후에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다. 불법적인 국가 권력의 행사로 국민의 인권이 유린된 사건으로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왜곡된 한국 현대사인 것이다.

여순 사건은 한국 전쟁 전후에 발생한 여타 개별 민간인 희생 사건에 비해 민간인 피해 규모가 매우 크며, 사건 전개 기간 및 피해 지역도 광범위하다. 전남도의 피해 조사 결과에 의하면 1만 1131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고, 피해 지역도 전남, 전북 및 경남 일부 지역까지 33개 시군에 달한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여순 사건을 철저히 이용했으며, 여순 사건에서 시작된 빨갱이 낙인찍기가 한국 현대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돼왔다. 여순 사건의 그릇된 역사 인식으로 인해 여수·순천·구례를 비롯한 전남 동부 지역 희생자와 유가족 분들은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상호 불신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

‘빨갱이’라는 멍에가 씌워진 희생자들과 ‘빨갱이 가족’이라는 딱지가 붙은 유가족들은 지난 70년 동안 온갖 차별과 냉대 속에 침묵과 통한의 세월을 살아왔다. 유족들은 부모, 형제, 친척을 잃은 박탈감 속에 정신적 후유증으로 평범한 가족생활도 영위하지 못했다. 가장을 잃은 가족은 생계가 곤란해지고,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등 경제적 궁핍 속에 우리 사회의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이승만 정권의 사상 통제 강화로 신원 조회와 연좌제에 묶여 해외 출국, 공직 진출, 취업 등 모든 생활에 불이익을 받음으로써 사실상 사회 구성원이 아닌 이등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이분들의 수난의 세월은 반드시 진실을 규명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하지만 아직껏 진실 규명과 피해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006년 과거사 정리법에 의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여순 사건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의결하고 진실 규명 작업을 했지만, 보고된 1만 1131명의 인명 피해 중 실제 진상 규명은 10%에 불과했다. 또한 진실·화해 위원회의 정부 공식 사과 및 위령 사업 지원, 역사 기록 정정 등 권고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이행 조치는 매우 부진했다.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에 항명함으로써 촉발된 여순 사건은 제주 4·3 사건의 연장선에 있는 대한민국의 불행한 역사이다. 제주 4·3 사건은 특별법이 제정되어 국가적으로 지원 체계가 구축되고 기념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여순 사건은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법적 근거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

여순 사건 특별법안은 지난 16대, 18대, 19대 국회에서 연이어 발의됐지만 논의가 공전돼 결국 무산됐다. 이번 20대 국회 들어서도 제가 여순 사건 70주년이던 지난해 11월 19일 300명 국회의원 중에서 106명의 서명을 받아 여순 사건 특별법을 대표 발의한 것을 비롯해 모두 다섯 명의 의원이 법안을 발의해놓은 상태지만,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한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순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은 문재인 정부의 ‘과거사 바로 세우기’라는 국정 철학을 실현하는 것이다. 2003년 10월 31일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 때 국가 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올해 제주 4·3 사건 71주년 추념사에서 “제주도민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4·3의 진실을 채우고 명예를 회복하며 희생자 유해를 발굴하고 실종자를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여순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두 사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쌍둥이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 다르다. 제주 4·3 사건은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고, 2014년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올해엔 처음으로 군과 경찰도 4·3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여순 사건은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법적 근거도 마련되지 않고 있고, 유가족들마저 한을 풀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가면 진상 규명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에 여순 사건 특별법 제정은 매우 시급한 사안이다. 하루빨리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만이 불행한 과거 역사를 청산하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