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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전라도의 혼(魂) <제1부> 전라도, 백성과 나라를 지키다] <7> ⑥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대의다
전남 함평에 상해임시정부 청사가 있다
-임정과 항일독립투쟁
김철, 1919년 임정 전남대표61920년 김구 등과 의용단 조직
함평 생가터에 임정 청사 복원…기념관·안중근 의사 동상 등
보성 박문용, 3·1운동 계기 천진서 불변단 조직 독립운동
1920년 임정 조선독립사령부 가담 국내조직 총책으로 잠입
대종교 창시 ‘항일독립운동 대부’ 보성 출신 나철
2019년 03월 26일(화) 00:00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 건립된 상해 임시정부 청사.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 의원과 교통부장관 등을 지낸 일강 김철 선생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과 임시정부 청사를 재현했다. /함평=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광주일보 연중 시리즈 ‘천년 전라도의 혼’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 기획취재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제1부>의로운 땅’을 ‘<제1부>전라도, 백성과 나라를 지키다’와 ‘<제2부> 전라도, 시대정신을 이끌다’로 세분화하고, ‘<제2부>문화예술의 향기’는 ‘<제3부>전라도, 문화예술을 꽃피우다’로 소제목을 수정해 연재합니다. <편집자>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새해 정부가 갖춰야 할 자세로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처럼 보면서 소처럼 걸어간다)’을 제안했다. 나라 안팎의 동향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당장 할 일과 길게 보며 할 일을 가려 또박또박 일해 가자는 의미를 담았다.

나라 안팎이 급변하고 있다. 국제 정세와 국내 갈등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채 움퍽질퍽하다간 100년 전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시기다.

일강 김철 선생 동상
◇상해 임시정부 청사가 전라도에?

상해 임시정부 청사가 전라도에 있다고? 있다. 함평이다.

어떤 연유로 함평에 임시정부 청사가 생긴 걸까? 초대 임시 의정원 전남 대표였던 일강 김철(1886~1934) 선생이 고리다.

1886년 10월15일 함평군 신광면 구봉산 기슭에서 태어난 김철은 호남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교통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국호 ‘대한민국’을 결정한 각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또 언론인이자,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기획하고 한국군인회를 조직한 실천적 군인이었다.

그의 독립에 대한 열의는 독립신문 1921년 1월 1일자 ‘경축 독립신문’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글에서 알 수 있다. “神斧鬼誅 春秋大義 河山重整(신부귀주 춘추대의 일승월긍 하산중정·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역사의 대의다.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그는 또 독립운동에서 언론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삼천리’ 창간 3주년 기념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독립운동가는 많으나 의견이 통일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서로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일된 의사와 집중된 이론을 표시·교환하는 출판물이 없어 유감”이라며 “편파하지 않고 양심있고 현명한 언론기관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함평 천석군의 아들이었던 그는 모든 가산을 처분해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손병희와 함께 3·1운동을 계획했고,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4월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나용균·한남수 등과 전남 대표로 선출됐다. 1920년 상해에서 김구·손정도 등과 함께 의용단을 조직하고, 위원장 안창호를 도와 선전업무에 종사했다. 1923년에는 임정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에는 군무장으로서 임정 군사업무를 담당했고, 군무장 재직때 윤봉길·이봉창 의거를 김구와 같이 주도했다. 1931년 3월에는 중국과의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결의하고, 한중 항일동맹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펼쳤다.

그는 1934년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급성폐렴으로 48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장례는 임시정부장으로 치뤄졌으며, 항주시 악비묘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김철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함평 생가터에 1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복원하고, 김철기념관과 안중근 의사 동상 등이 세워졌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쇄실마을 입구에는 의사 박문용 기적비<왼쪽>와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사이또 총독을 저격하다

광주일보 전신인 전남일보 1979년 2월 28일자에는 ‘기미 독립만세 60년만에 밝혀진 제2의 독립선언 주역’이란 제목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있다. 문강공 박광전의 11대손 박문용(1882~1927) 선생이다.

신문은 ‘박문용 선열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하는 것을 틈타 남대문정거장에서 이들을 맞는 사이또 총독과 정무총감 이완용·송병준 등을 암살하고,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다 거사 직전에 체포돼 고문과 지병으로 광복의 햇빛도 보지 못한 채 끝내 순사했다.’고 기록했다.

1882년 1월 15일 보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재질이 비범했다. 9살때 어디론가 떠나갔다가 서울로, 중국으로, 러시아로 떠돌았다. 그러면서 신교육을 받았다. 그는 영어·일어·중국어·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당시 4개 외국어를 말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유일했을 게다.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일본인들도 인정해 거금보통학교 교장, 보성 복내면장·겸백면장이 됐다. 그는 겸백면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징수한 세금 327원6전을 가지고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박환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1919년 4월에는 3·1운동을 계기로 천진에서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0월 31일에는 상해 임정 주관으로 김구·박은식 등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30인 중 한 사람으로 제2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듬해인 1920년 임시정부의 조선독립사령부 조직에 가담, 국내조직 총책으로 잠입했으며, 그해 8월 미국 상원의원단 환영행사 중 이완용·송병준 등을 암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돼 투옥됐다. 그 때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몸이 크게 병들었고, 1929년 7월20일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1980년 광복절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1981년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쇄실쉼터휴게소에 기적비를 건립했다. 그 곳에는 임정의 상징인 백범 김구 선생 은거추모비가 함께 있다. 쇄실마을이 바로 지척이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쇄실마을 입구에는 의사 박문용 기적비<왼쪽>와 백범 김구 선생 은거 추모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 대부’ 나철과 북로군정서

보성 출신 홍암 나철은 대종교를 창시한 ‘항일독립운동 대부’다. 종두법의 지석영, 한글학자 주시경·김두봉·최현배,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신채호·박은식,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이동휘·김동삼·이범석, 소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 ‘아리랑’을 제작한 나운규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대종교가 육성한 독립군이다.

1863년 태어난 나철은 10세 무렵 매천 황현이 스승으로 모신 구례의 왕석보 문하에서 수학했다. 1892년 개화파 김윤식 문객으로 활동하던 중 문과에 장원급제해 승정원 가주서, 승문원 권지부정자 등을 지내다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호남의 우국지사들을 모아 1904년 비밀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 구국운동을 했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이기·홍필주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했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일본의 악의에 크게 실망하고 급히 귀국했다.

일본의 의도를 간파한 나철은 먼저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한 을사오적의 처단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로 인해 1907년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순종 즉위 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새로운 투쟁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09년 1월 15일에 오기호·유근 등과 같이 단군교를 창시하고 교단을 설치해 초대 교주에 취임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종교적 활동을 항일운동의 새로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다. 1910년 8월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했다. 대종교가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하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교단의 존폐 위기에 부딪친 나철은 1916년 8월에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목숨을 끊음으로써 대교를 위해 죽는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단식, 순국했다. 그후 대종교 교단은 만주로 옮겨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1962년 정부에서 나철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