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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잘못된 서훈 등급
2019년 02월 28일(목) 00:00
독립 유공자 서훈 등급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데 공을 세운 독립 유공자들을 표창하는 건국훈장은 총 5등급인데 1등급이 대한민국장이다. 2등급이 대통령장, 3등급이 독립장, 4등급이 애국장, 5등급이 애족장이다. 그런데 이름만 들어도 “저 분이 왜 저 등급이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승만 정권 시절 대한민국장은 1949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둘뿐이다. 그래서 이승만 혼자 받기 민망하니까 이시영 선생을 끼워 넣었다는 말들이 많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건국훈장 수훈을 재개했다. 그래서 그나마 김구·안창호·김창숙·신익희 등의 임시정부 계열과 3·1운동의 손병희·이승훈·한용훈, 그리고 만주 무장투쟁의 김좌진, 오동진 등과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준 등이 대한민국장을 받을 수 있었다. 유신 때인 1976년에는 임병직이 대한민국장을 받았는데, 임병직이 누구인지 아는 대한민국 국민은 별로 없었다.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활동한 인연으로 외무부장관을 역임했고, 5·16 군사 쿠테타 후 재건국민운동본부장, 그리고 유신 시절 한국반공연맹이사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처럼 과포장도 물론 문제지만 실제 독립운동 행적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등급을 받은 경우는 더 큰 문제다. 이런 예는 너무 많지만 우선 두 분만 들면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과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이다.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자 두 선열은 온 집안이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만주에서 군사력을 길러 결정적 순간에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해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찾게 되는 나라는 국왕과 귀족들이 중심이 되는 제정(帝政)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중심이 되는 공화정(共和政)이었다. 그래서 석주와 우당은 서간도에 민단자치조직인 경학사(經學社)를 세웠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1920년의 봉오동, 청산리 대첩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전문 군사 훈련을 받은 졸업생들이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로 병사들을 지휘했기에 거둘 수 있었던 승전이었다. 게다가 석주 이상룡은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인 국무령제로 정체(政體)를 전환했을 때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한 국가수반이었다.

우당 이회영은 말보다 행동으로 독립 전쟁에 나섰던 아나키스트들의 대부였다. 두 분 모두 무장 투쟁으로만 한국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던 무장 투쟁론자들이었다. 이상룡은 서간도 무장 투쟁의 대부였고, 1932년 길림성 서란에서 한 많은 인생을 마치면서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유해를 본국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이회영은 예순여섯의 노구로 일제가 강점한 만주로 잠입해 무장 투쟁을 전개하려다가 대련 수상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사했다. 실로 두 선열은 한국독립전쟁사의 이념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 가장 앞머리에 두어야 할 분들이지만 두 분 다 3등급인 독립장에 머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현상의 뿌리를 찾으면 반드시 일제 잔재와 만난다. 박정희 정권 때 서훈 심사위원 중에 이병도·신석호 같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출신들이 들어가 있었다. ‘한국독립사’를 저술한 참의부 참의장 출신 희산 김승학 선생도 생존 독립운동가를 대표해서 위원으로 들어갔는데, 이병도·신석호 양인에게, “임자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뭐 아나?”라고 일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독립 전쟁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 서훈 등급 결정을 주도했고, 그 결과 지금의 뒤죽박죽 결과가 나온 것이다. 유관순 한 분의 등급을 높이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유관순에 대한 재평가를 포함해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서훈 자체를 전면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근본 조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선열들의 살신성인으로 되찾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국민과 정부가 갖춰야 할 기본적 예의다.

<신한대 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