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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생각’] 나무가 전하는 침묵의 아우성
2019년 02월 14일(목) 00:00
주말 이른 아침, 도시 한가운데에서 천년을 살아온 은행나무를 찾았다. 주중에는 무척 번잡한 거리 곁에 서 있는 나무다. 나무 앞 비탈진 도로 건너편에는 이 도시의 대표적인 종합병원이 있고, 비탈 위쪽으로 100m도 채 안 되는 곳에 한 대학교 정문이 있는 거리다. 오가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도심이다. 하지만 주말 이른 아침은 고요했다. 홀로 우뚝 선 나무는 언제나처럼 침묵이다.

은행나무는 이 도시의 보호수 제1호, 천년을 살아온 나무다. 한창때는 30미터까지 치솟았던 나무지만, 지금은 10m를 겨우 넘을 정도로 스러졌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가늣한 나뭇가지는 잘라 냈다. 나무의 키는 자연히 낮아졌고, 전체적으로 앙상한 느낌을 주는 성긴 생김새다. 천년의 위용은 사라졌다. 봄이면 나무는 새 가지를 내고, 가을이면 사람은 나뭇가지를 잘라내고…. 천년에 걸쳐 나무가 사람의 마을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언제 누가 심었는지 기록이 없어서 나무의 내력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대신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가 흙에 덮이면 마을에는 역병을 비롯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전설이다. 나무가 보여 주는 풍경 가운데 장관인 것은, 사방 10m 반경으로 둘러친 울타리 안쪽의 바닥 위로 돋아 올라 꿈틀거리는 뿌리다. 십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뿌리의 상당 부분이 흙에 덮였다. 전설을 믿지 않는 합리와 실용의 시대라고는 해도 사람살이에 해로운 일이 생긴다는 짓을 일부러 했을 리는 없으리라. 대관절 어찌 된 일일까. 가만히 바라보니 뿌리 위의 흙 사이에 돋아난 이름 모를 풀들의 새싹이 눈에 들어왔다. 흙은 세월이 지나면서 저절로 쌓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설을 잃어 가는 사이에 나무 뿌리 위에 흙 먼지가 곰비임비 쌓였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언덕 위쪽에서 빗물에 섞인 흙이 흘러왔고, 흘러내린 흙은 뿌리와 뿌리 사이에 차곡차곡 고였다. 애오라지 쌓인 한줌 흙을 보금자리 삼아 풀씨들이 날아들어 싹을 틔웠고, 여린 풀잎 곁에는 다시 또 흙이 쌓이며 지금에 이르렀지 않나 싶다.

땅 위에 저절로 드러난 뿌리 위에 흙이 쌓여 덮이는 건 나무의 생육에 치명적이다. 이른바 복토(覆土)다. 복토로 죽어간 나무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무가 죽으면 나무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을 일이 없다. 전설은 결국 나무를 지키기 위해 옛 사람들이 지어낸 지혜로운 이야기다. 나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옛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나무는 전설을 통해 사람의 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전설을 잃어 가는 현대의 도시에서 나무는 자칫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사람의 마을에 전설이 사라지자 나무의 말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자연스러운 순서다. 과학의 시대에 전설은 별무소용(別無所用)이고, 도시에서는 누구도 침묵하는 나무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무 이야기를 잃어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무는 하릴없이 기력을 잃었다.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사람살이를 풍요롭게 지켜온 나무에게 닥친 슬픈 운명이다.

지난 세기에 명수필 ‘침묵의 세계’를 남긴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막스 피카르트는 현대인의 모든 병은 ‘침묵의 상실’에서 온다고 했다. 이어 모든 현대병의 치유는 침묵의 회복에 있다고 강조했다. 침묵은 언어의 중단이 아니라, 언어 이전에 존재한 심연이라고 강조한 그는 그 모든 침묵 가운데 자연의 침묵이야말로 모든 생명이 가장 생명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라고 했다.

도시에서 침묵으로 살아가는 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은 그래서 쓸쓸하다. 말하지 않으면서 천년에 걸쳐 사람에게 가장 많은 말을 걸어 온 나무가 신화와 전설이 사라지는 과학의 시대에 바라보는 사람 하나 없이 스러져가야 하는 운명이 서글프다.

세상의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생명의 진리가 외면되는 세상에서 나무가 침묵으로 들려주는 하고한(하고많은) 이야기에, 가만가만 귀 기울여야 할 때다. 그것이 곧 우리가 이 땅의 봄을 더 찬란하게 맞이하는 방법이다.

<나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