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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맛있는 이야기’] 한반도 돼지고기의 서사
2019년 02월 07일(목) 00:00
설과 함께 기해년(己亥年) 황금돼지의 해가 본격적으로 밝았다. 12지신 중에서 인간이 식용으로 기르는 동물은 소, 양, 말, 닭, 돼지 정도다.

이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은 돼지고기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두드러진다. 2017년 기준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은 24.5㎏으로 닭고기 13.6㎏, 쇠고기 11.5㎏과 비교해 단연 압도적이다.

작년 한 해에만 1735만 마리의 돼지가 식용으로 도축됐다. 동네마다 치킨집이 수두룩하고 ‘1인 1닭’ 시대가 도래했지만 소비량에서는 여전히 돼지고기가 앞서고 있다.

돼지는 신석기 시대부터 가축으로 길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이 가축으로 길렀던 동물은 살아서 분명한 역할이 있었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핵심적인 농기구였다. 밭과 논을 갈고 무거운 짐을 옮기는 데 인간보다 나은 노동력을 제공했다. 개는 인간의 벗이 되어 주었고 가축을 치거나 보호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했다. 하다못해 닭도 땅속에 있는 유해한 벌레를 잡아먹으며 요긴한 알을 낳아 주었다.

그런데 돼지는 땅을 갈지도, 가축을 보호하지도, 알을 낳지도 않았다. 오로지 먹기만 했다. 심지어 잡식성이었던 돼지는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지도 않았다. 인간이 먹기 위해 애써 재배한 작물을 넘봤다. 하는 수 없이 우리에 가둬 인간이 먹을, 혹은 인간이 먹던 것을 나눠 먹였다. 돼지의 서사에서 첫 번째 의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굳이 이렇게까지 키웠던 것은 돼지는 죽어서 존재감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민원을 접수하는 행위다. 부탁을 하는데 맨입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 제물이 필요했다. 생명이 있는 것을 바칠수록 인간의 절실한 의지가 전달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살아서 역할이 분명한 가축을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를 면하고 복을 부르는 제물로서 돼지만큼 적합한 동물도 없었다.

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끝나면 인간의 축제가 시작됐다. 돼지의 두 번째이자 결정적인 존재감은 이때 두각을 나타낸다. 신에게 제물로 돼지가 바쳐지는 날은 곧 인간이 고기를 먹는 날이다. 넓은 의미의 ‘고기’는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신체 조직 전부를 의미한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신체의 일부를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근조직인 좁은 의미의 고기와 간·콩팥·창자 등의 내장 기관으로 구분한다.

이때 고기는 근육, 다시 말해 동물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종의 추진 장치다. 추진 장치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동물과 식물의 에너지원은 탄수화물과 단백질인데 지방은 같은 무게의 탄수화물에 비해 2배나 높은 칼로리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에너지의 밀도가 높다는 의미다. 그래서 움직임이 많은 동물은 지방의 형태로 에너지를 저장한다. 그래서 가축을 도축해서 고기를 얻는다 함은 추진 장치인 근육과 에너지원인 지방만 분리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재래종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인간이 먹을 것을 나누며 애써 키워 봐야 60㎏이 넘지 않았다. 여기서 얻어지는 고기는 겨우 30㎏ 남짓. 축제를 즐기고 배불리 먹기에 충분치 않은 양이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분배의 정의를 실현할 방법이 필요했다. 머리·뼈·내장 등을 모두 넣어 끓여서 국물을 얻고, 밥이나 면을 말고, 고기 몇 점을 올렸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축제다운, 잔치다운 분위기가 연출됐다. 돼지국밥의 탄생이다.

공동체 중심의 농경 사회에서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도래하고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공리주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대량 사육의 핵심은 속도와 효율성. 버크셔, 랜드레이스, 듀록이라는 외래 품종을 섞어 삼원교잡종이라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다. 재래종과 비교해 이 새로운 품종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한 번에 새끼를 14~17마리까지 낳았다.

태어날 때 1.5㎏이었던 것이 사료만 잘 먹이면 6개월 만에 115~120㎏까지 성장했다. 심지어 지방도 적어 훨씬 더 많은 비율의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축제나 경조사가 아니라도 고기 맛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거리마다 삼겹살집이 넘치고, 가장 서민적인 음식점인 기사 식당의 대표 메뉴가 돼지불백이 되었고, 휴가철이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돼지고기 굽는 연기를 피울 수 있게 되었다.

황금돼지해인 올해는 돼지고기의 수요가 조금 더 늘어나 도축은 1770만 마리, 생산량은 95만2000t으로 2018년에 비해 2% 정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신년을 맞아 올 한 해 도축될 모든 돼지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뜻을 전하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바이다. 지난 수천 년 동안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