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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숙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3·1운동 100주년엔 할머니들께 사죄와 배상을
2019년 01월 08일(화) 00:00
소녀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버지가 천자문을 가르쳐줬지만, 소녀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1939년 아홉 살 때 입학의 꿈이 이뤄졌다. 영특했던 소녀는 공부도 잘 하고, 달리기도 잘해서 곧잘 상을 받았다. 공책·연필 값은 거의 안 들었고, 줄곧 급장(반장)을 도맡았다.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은 커져만 갔다.

6학년 5월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고, 중학교도 보내준다”며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소녀는 일본으로 갔다.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 열네 살 소녀는 하루 종일 서서 전투기에 페인트칠을 했다. 일은 힘들었고, 늘 배가 고팠다. 독한 시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중학교는 언제 가냐고 물어보면 기다리라고 했다. 왜 월급을 안 주냐고 물어보면 다 저금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소녀는 강제 동원, 강제 노동 피해인 줄도 몰랐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왔지만 부모님을 다시 만났다는 기쁨은 짧았다. 오히려 소녀는 부모님의 걱정거리가 됐다. 스무 살에 어렵게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했고 폭력을 일삼은 끝에 집을 나가버렸다.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의 이야기다. 소박한 꿈이었던 선생님도, 단란한 가정생활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부족한 전시 노동력 충당을 위해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소녀들까지 군수 공장에 동원했다. 10대의 소녀들은 매일매일 가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1944년 12월에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에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는커녕 임금 한 푼 받지 못 했다. 해방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여자 근로정신대원들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오인으로 가족의 외면과 폭력, 이혼에 노출됐으며 주변의 손가락질까지 감당해야 했다.

수많은 양금덕들의 목소리는 1990년대 들어서야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지원 단체와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전범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2018년 11월 29일 마침내 대법원 승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일본 나고야지방재판소에 제소했던 소송으로부터 18년 6개월, 국내에서 소송을 제기한 지 6년 만이었다. “상고를 기각한다. 상고 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이 두 마디 선고에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 이 판결을 듣기까지 소녀들은 구순 언저리의 할머니가 됐다.

외롭고 지난한 노력 끝에 역사적인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사죄와 배상은 아직이다.

일본 정부는 우리 사법부의 판결은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나아가 자기 나라 기업들에게 개별 대응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고 있다. 국제법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반인도적 불법 행위이자 명백한 강제 노동 금지 협약 위반인데 일본 정부는 왜 큰소리를 칠까? 최근에 중국 강제 노동 피해자들에게는 사죄하고 배상했으면서 왜 우리나라 피해자들에게는 이토록 강경할까?

뉴스를 통해 전범 기업의 배상 책임 판결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양금덕들이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령의 피해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만 하는가. 이제 그동안 뒷짐만 지고 있었던 정부가 답해야 한다. 재판 거래, 사법 농단을 통해 재판을 방해하고 지연시킨 것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막중한 책임을 지고 더 이상 피해자들이 법정을 드나들게 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들은 이미 해야 할 몫을 초과했다.

우리 정부는 한일 외교적 합의를 통해 모든 피해자들을 구제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올해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온 국민이 일어섰던 3·1운동 100주년이다. 피로써 나라를 되찾은 국민들에게 반드시 역사의 정의를 돌려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