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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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
2018년 05월 29일(화) 19:40
화순 춘양에 들어와 산 지 벌써 4년이나 됐다. 이 마을에는 89세의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그 분은 젊은 시절 강원도 산골까지 다니시면서 벌꿀을 쳤다. 돈도 많이 벌었고 자식 농사도 잘 지으셨다. 이곳에 처음 들어 왔을 때 동네 분들을 잘 모시겠다는 다짐으로 ‘참나무 집 아무개’라고 인쇄된 수건을 한 장씩 돌렸는데 그 영감님은 그 후 나만 보면 “어이, 고씨!”라고 부르셨다. 이미 건방져버린 내 심보로 그 호칭을 감내하기가 어려웠지만 어쩔 방법이 없어 세월이 가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예”하며 얼굴로만 웃었다.

그렇지만 소용없었다. 지금까지도 내 이름은 “고씨!”이다. 이제는 나도 내 삶의 진실을 간파했으므로 마음이 편안하다. 작년 늦가을이었다. 석양 무렵 영감님이 건너편 빈 집 마당에 서서 “어이, 고씨!” 라며 큰소리로 부르셨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갔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본 영감님은 마당에 흩어져 있는 은행 알을 주워 담을 수 있도록 양푼을 들고 오라고 호통을 쳤다. 그만큼 활달하셨다는 얘기다. 초겨울까지도 영감님은 검정 털모자를 두르고 씩씩하게 고샅을 걸어 다니셨다.

그런데 봄을 앞둔 어느 날 깜짝 놀랐다. 앞산은 분홍빛 진달래로 붉게 물들어 있는데 영감님은 믿을 수 없도록 쇠약해져 있었다. 한 계절을 보냈을 뿐인데 그처럼 진기가 빠질 수 있다니, 마치 빈 집 같았다. 풀과 대나무가 지붕을 뚫고 나온, 대들보와 서까래가 검게 썩어 형체를 잃어가고, 마당에는 무성한 잡풀만 자라고 있는 묵은 집 같은. 그 집의 담장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었으니 나는 그 순간 삶의 덧없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노년의 느린 삶에 시간은 쓸 데 없이 얼마나 분주한 것인가….

또 한 분 나주반의 주인이 있다. 2015년 봄부터 그분으로부터 목공예를 배우면서 목물을 만들고 있다. 나주반은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면서도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우리나라에는 ‘나주반’, ‘해주반’, ‘통영반’ 등 3대 소반이 있다.) 그 분은 나주반의 성격대로 투박하고 담대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 분도 역시 경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듯하다. 외로움을 불쑥불쑥 내비친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해도 나이 앞에서 감출 수 없는 상처가 있으니 바로 노년의 현실-삶과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보는 일-이 아닌가 싶다. 경계에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힘듦이 있을까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지난 3년 반 동안 영감님은 힘겹게 병들을 다스려 오셨다. 고관절, 폐렴, 척추 이상, 해소와 천식. 그밖에 알 수 없는 정신적인 고통들도 있었을 것이니 지난 몇 년은 실망의 연속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분의 마음 속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을 하고 싶어 죽것다.”고 하셨다. 하지만 일을 하면 아드님이 가만두지를 않았다. 평생 일손을 놓지 못한 분의 일에 대한 욕구와 그 일을 하면 반드시 고통스러워 한다는 사실을 아는 아들의 생각이 부딪친 때문일 것이다. 영감님은 병과 친구 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돈은 필요 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문화재’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감내했던 경제적 고충을 얘기할 때는 신념과 현실의 갈등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노인의, 천식을 앓는 거친 호흡과 마디 굵은 주름살을 보며 연민이 샘처럼 솟았다.

그것은 무지근하게 마음을 눌렀고 급기야 언젠가 다다라야 하는 우리의 종점을 생각하게 했다. 넌지시 삶의 덧없음을 뇌까렸더니 나주반은 아홉 번의 옻칠을 해야 완성된다면서 “‘덧없음의 깨달음’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옻칠이 아닐까?”라고 되물으셨다. 무릎을 쳤다. 덧없음이란 소멸과 상실에 대한 허무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인정하므로써 얻는 자기 갱신일 것이다. 갱신은 만족스런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삶의 원형이다.

곧 다가올 선거의 입후보자들께 범박하나마 이 덧없음의 교훈을 꼭 전하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두 분 노인장들께서는 새봄을 맞아 건강해지셨다. 두 분을 일으켜 세워준 푸르른 신록의 선처가 너무나 감사하다.
ej6621@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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