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영 순천 매곡동성당 주임신부] 우리 안에 있는 방관자적 태도
지난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 청소년 지도사 자격 연수를 받으면서 학교 폭력에 대한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마침 필자가 속한 조에서는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방관자에 대한 나눔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점점 더 심각해져가는 학교 폭력을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중심으로 바라봤던 저로 하여금, 그 현장의 또 다른 존재인 방관자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방관자에 대한 연구와 실험은 1964년 뉴욕에서 있었던 제노비스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먼저 나서서 도와주지 않게 된다는 방관자 효과는 비단 학교 폭력의 현장인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해자도 아니고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과는 한걸음 떨어져서 비난하거나 안도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래서 방관자 효과를 대중적 무관심 또는 구경꾼 효과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건’은 우리 마음 속에 은연 중 각인이 됩니다. 특별히 여러 가지 이유로 학교 폭력의 방관자가 되었던 청소년들은 자조감과 자괴감으로 매우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펜실베니아주립대 해즐러 교수는 학교 폭력을 목격한 방관자들의 트라우마가 지진 현장에 투입된 구조 요원들의 트라우마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청소년들이 어떤 학대나 폭력 상황에 대응해야 할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그 사건’이 앞으로 많은 날들을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성인들 역시 조금은 차이가 있겠지만 방관자 트라우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루카복음서 10장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9∼37절)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지만, 사제나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가버립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이유와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삐 그 자리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써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 앞장서서 사랑을 실천해야 했지만, 그들은 괜히 그 상황에 엉켜들고 싶지 않아서 도움을 필요로 한 이를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주류인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고,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쓰던 사제나 레위인은 어쩌면 방관자 트라우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고통 받고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만나면 그 즉시 도와줄 용기는 없었을지라도 신경은 쓰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번엔 용기를 내어 보리라 다짐도 해보셨겠지요.
사제로 살아가는 필자 역시 이 복음 말씀을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방관자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그런 일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간주하고 판단하며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들이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모습에 별 생각 없이 웃다가도, 한편으로는 다사다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건 아마도 방관자적 태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4월은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당한 제주 4·3사건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달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그저 방관자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고 기꺼이 함께 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미래가 다가올 것입니다.
루카복음서 10장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29∼37절)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지만, 사제나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가버립니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이유와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삐 그 자리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써 어쩌면 다른 이들보다 더 앞장서서 사랑을 실천해야 했지만, 그들은 괜히 그 상황에 엉켜들고 싶지 않아서 도움을 필요로 한 이를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주류인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한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고,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쓰던 사제나 레위인은 어쩌면 방관자 트라우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도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고통 받고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만나면 그 즉시 도와줄 용기는 없었을지라도 신경은 쓰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번엔 용기를 내어 보리라 다짐도 해보셨겠지요.
사제로 살아가는 필자 역시 이 복음 말씀을 읽을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만 가까이 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방관자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그런 일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간주하고 판단하며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들이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모습에 별 생각 없이 웃다가도, 한편으로는 다사다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건 아마도 방관자적 태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4월은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당한 제주 4·3사건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달이기도 합니다.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그저 방관자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함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고 기꺼이 함께 하고자 할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는 미래가 다가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