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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언론인] ‘인권의 날’에 생각나는 두 가지
2017년 12월 12일(화) 00:00
“사형이 구형되었다. … 김병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첫마디가 ‘영광입니다’ 아아!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 들기 시작했다. 죽인다는데, 죽는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꽃도 바람도, 눈매 서늘한 작은 연인도, 어여쁜 놀 가득히 타는 저 산마을의 푸르스름한 저녁연기의 아름다움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살 많은 저 인자한 얼굴 모습도, 흙에 거칠어진 아버지의 저 마디 굵은 두 손의 훈훈함도, 일체가,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데…”



사형제 폐지되어야 한다



이는 1975년 2월 말, 이제 막 석방된 김지하가 동아일보에 쓴 ‘고행-1974’의 앞부분으로, 1974년 7월 9일 오전 열린 비상 군법회의에서 이철, 여정남,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유근일, 이현배 등과 함께 사형 구형을 받을 때의 한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때 죽음은 이들에게 그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사형 구형은 단지 엄포만이 아니었다. 광기 어린 박정희 유신정권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시절이었다. 실제로 이들의 배후로 몰려 이들과 함께 구속되었던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은 1975년 4월 9일 새벽에, 대법원 판결이 난 지 채 24시간도 되기 전에 처형되었던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 무렵부터 나는 사람이 사람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형식상 합법적이라고는 하지만 법의 이름을 빌려 정치적 반대자를 죽이는 일을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수없이 지켜봐야 했다. 설사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되돌릴 수 없는 형벌로서의 사형제가 과연 생명과 천지창조의 질서에 합당한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경우 1995년부터 2012년 5월까지 재판을 받은 강력 범죄 사건 중 1심에서 유죄가 나온 것이 2심에서 무죄로 바뀐 경우가 무려 540건에 이른다고 한다. 3심까지 가서도 끝내 오심이 밝혀지지 않아 사형을 당한다면 그것은 필경 억울한 죽음이 될 수밖에 없다.

국제엠네스티에 따르면 세계 198개 국가 중 사형 폐지국과 10년 이상 형을 집행하지 않은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은 141국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사형 집행을 중단해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강력 사건만 나오면 사형 집행 요구가 터져 나와 그때마다 불안하기 짝이 없다. 국회에서도 사형 제도 폐지 법안이 발의되었다가 자동 폐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앞서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의 문 앞에 서 있었던 유인태 전 의원이 사형 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한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할 도덕적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고문도 근절되어야 한다



1974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에 명동성당에서는 ‘인권 회복을 위해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여기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우리의 인권 주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최종길 교수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고문치사되었다. 많은 사람의 증언과 해외 언론의 보도가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 … 인권 유린의 수부(首府) 중앙정보부는 마땅히 해체되어야 한다.”

이어서 18일에는 ‘최종길 교수와 떠난 모든 형제들을 위한 추모미사’를 올렸는데, 오태순 신부는 추모사에서 “1973년 10월, 불의와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분노가 학원에서 폭발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당신의 제자들인 학생들을 연행, 구속했습니다. …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당신께서는 교수회의에서 정보부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 당신의 자살은 날조된 것입니다. … 이제사 우리는 다 같이 모여 통곡으로 당신을 추모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그때의 벅찬 감동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말씀의 폭풍이었고, 암흑 속의 횃불이었다.

이 같은 일은 당시로서는 오직 사제단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모험이요 용기였다. 40여 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최종길 교수의 명예는 회복되고, 자살이 아닌 것만은 밝혀졌지만, 어떻게 죽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고문한 자는 살아 있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산 자여,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고문은 근절되어야 한다.

그의 30주기가 되는 날이었던 2003년 10월 18일, 서울대학교 근대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에 최종길 교수 기념홀(소강당)이 만들어졌다. 그 입구에는 최종길 교수의 얼굴 부조와 함께 명(銘)이 새겨졌는데, 외람되게도 그 글은 내가 썼다. 그것이 지금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

“최종길 교수(1931∼73)는 이 대학에서 법과 정의를 가르쳤다. 그는 학문으로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학자요 선지자였으며, 내 몸을 던져 제자를 사랑했던 참 스승이었다. 달을 보고 해라고 말해야 했던 시대, 그는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외치다가 불의한 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그는 진실 없이는 정의 없고 정의 없이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그의 온 생명을 들어 증거하였다. 이 방에 들어오는 이는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고 있다. ‘오늘 당신은 이 땅의 인권과 정의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