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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세훈 고려대 명예교수] 기억의 기만(欺滿)
2017년 12월 05일(화) 00:00
사회이론과 종교사회학 분야에 방대한 저술을 남긴 미국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 1929∼ )는 70년대 중엽 펴낸 ‘희생의 피라미드’라는 책에서 전후 사회주의 발전 경로를 겪었던 중국과 자본주의를 택했던 브라질의 두 대국을 비교하며 근대화의 비용을 계산한 바 있다. 에세이 풍의 사유로 풀어낸 그의 주장을 정설로 못 박을 수는 없겠지만, 그는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성장의 신화’를 전면에 내걸었던 자본주의적 발전 전략도 ‘혁명의 신화’를 기치로 학살과 테러의 폭력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공산주의의 그것 못지않게 인간 희생의 탑 위에 건설되었다고 관찰한다.

그 책이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출간됐고 저자가 사회주의에 비판적이었던 보수적 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학계 안팎의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체주의로 범주화된 20세기 좌우의 극단적 독재 정권들이 저지른 악행이야 누구에게나 끔찍한 것이지만, 인류는 반세기 가까운 냉전을 겪으며 흑백과 선악의 논리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해 하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집단적으로 편집되어 공식화되었으니, 반세기에 사반세기를 더하며 세계 최장의 냉전을 살고 있는 한국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 편견에 중독된 존재



성경 구약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바로 가는 대신,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나님이 아홉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키며 자유를 안겨 주었지만, 그들은 사막의 혹독한 삶에 맞닥뜨리자 노예의 땅 이집트를 오히려 그리워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겠노라고 울부짖는다.

노예 상태를 물리적으로 벗어나는 것과 내면의 노예근성을 거둬 내는 일은 전혀 별개였으니, 광야 40년의 길고 고된 세월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해방을 위한 훈련의 도정이었다. 인간은 기적을 눈앞에서 생생히 체험하고도 편의에 따라 얼마든지 곧바로 기억을 취사선택하는 취약한 존재인 바,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행한 일련의 고별 연설들에서 “기억하라, 기억하라…”며 자기 민족이 뒤틀린 기억의 미망에서 벗어날 것을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것이다.

기억의 왜곡이 집단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기억과 관련해서 인간은 모두 편집의 죄를 범하며 살아가거니와 편견에 중독된 자신의 기억은 확신하면서도 타인의 기억은 쉽사리 불신한다. 심리학조차 종종 개인을 피해자(victims) 아니면 가해자(villains)로 환원하는데, 악당보다 희생자가 되고픈 우리는 환경과 부모를 탓하며 평생을 분노와 원망 아니면 자책과 죄의식과 자기 비하 혹은 자포자기에 젖어 살기 일쑤다. 가령 영화 ‘애더럴 다이어리’(The Adderall Diaries, 2015, 파멜라 로만노프스키)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어릴 적 일탈을 폭력적으로 교정하려 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거칠고 힘든 삶을 살지만, 마지막에 아버지는 ‘자신은 그저 아들을 폭력적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라며 울먹인다. 결국 부자는 화해하나, 비극은 이미 한참 진행된 뒤였다.



치유, 미망에서 벗어나기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는 기억의 미망이 빚은 대표적 비극이다. 오셀로는 새로운 선택들 앞에서 번번이 이아고가 쳐놓은 그물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거니와, 데스데모나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은 하나하나 오셀로의 의심을 정당화시키고 현실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어둡게 편집되며, 기어이 참극은 찾아오고 만다. 실은 유혹에 빠져드는 일이란 유혹의 덫을 놓는 것 못지않게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세상은 나만 빼고 모두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밖에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기억의 기만이란 그물을 촘촘히 쳐놓고 바보 프레임에 자청해서 갇혀 그 안에서 편안해 한다. 실패는 모든 성공들보다 훨씬 집요하게 우리의 기억을 파고들어 머물며, 무수히 들었던 칭찬도 상처받았던 비판 한 마디를 상쇄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기억이다. 그리하여 치유(healing)란 요란한 심리 상담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스스로 쳐놓은 미망(deception)을 그저 벗어나면 완성되는 것이다.

12월이니 새해 또한 멀지 않았다. 올해도 홀마크 크리스마스 카드에는 한없이 평화로운 아기 예수의 얼굴이 담겨 있겠지만, 그것이 마구간에서 태어난 가난한 목수의 아들 모습일 리 없다. 출생 시부터 가난과 고대 중동의 풍토가 주는 온갖 냄새에 찌든 육신을 끌며(Jesus stinks), 비천한 무리와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그는, 이사야 선지자에 따르면 ‘외모도 풍채도 보잘것없고 아무런 매력도 없어 누구도 가까이하길 꺼리는, 슬픔과 질고(疾苦)를 아는 자’였다. 예수는 낮아지고 취약해짐으로써 뒤틀린 관계들의 회복을 꾀했거니와, 오늘의 한국 교회가 그를 잊을수록 물량과 크기에 집착하며 온갖 편법으로 세습을 도모한다 한들,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어쩌면 예수야말로 가장 왜곡된 기억의 희생자일지 모른다. 어쨌든 새해엔 우리 모두 그간 자신을 옥좼던 기억의 기만들을 샅샅이 찾아내 훌훌 떨쳐 버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