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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좌측담장’] 우승 뒤풀이
2017년 11월 23일(목) 00:00
내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님은 베어스의 오랜 팬이다. 한창 시즌 중에 복도에서 마주치면 늘 야구 소식을 묻고는 했다. 올해는 요즘 기아 잘 나가니 좋겠어요, 라는 인사가 많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올해 기아 어떡해요, 라는 걱정이 대부분이었다. 야구가 대체 뭐라고 안부까지 대체해 버린 것인지…. 어쨌거나 내심 작년보다는 올해의 인사가 나누기에 더 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랬던 그에게서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리던 날 저녁에 문자가 몇 통 왔다. 퇴근 후의 문자였지만, 마치 친한 선배의 그것처럼 심드렁한 몇 마디였다. “축하해요.” 그렇다. 그는 그 시간 잠실구장에 있었고, 나는 스마트폰으로 잠실구장의 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직관과 중계, 그것도 두 박자 느린 스마트폰 중계가 만들어 낸 시차 덕분에, 정작 우승 사실은 사장님의 문자가 먼저 알려주었다. 문자를 받고 몇 초 후, 두산의 마지막 공격은 김민식의 미트 속에서 끝나고 있었다. 타이거즈가 11번째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을 제외하고는 한국시리즈의 마지막은 늘 수비에 성공하는 장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서 말한 ‘끝내기’ 타점이 아니고는 야구는 ‘막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기 마련이다. 2017년을 포함해 11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타이거즈 또한 우승의 확정은 늘 9회말(혹은 9회초) 수비였다. 어느 야수가 공을 잡아 어떤 방식으로 아웃을 시키든, 카메라는 일단 투수를 비춘다. 투수를 중심으로 한 마운드에 선수들이 뛰어나와 환호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헹가래를 친다. 강력한 구위의 직구로 삼진을 잡고, 그 공을 아직 미트에 쥐고 있는 포수에 달려가 안기는 투수. 그 투수를 번쩍 안아 든 포수.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 시절, 광주의 야구팬이라면 장채근과 선동열의 포옹을 여태 기억할 것이다.

선동열도 없고, 이종범도 한때 없었고, ‘여차저차’해서 더 이상 강팀이 아니게 된 타이거즈에 다음 우승은 참 힘겹게도 찾아왔다. 앞선 우승들이 어쩌면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면 최근의 우승은 꿈처럼 아득하게 혹은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2009년의 끝 장면은 야구 만화라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2009년은 두말할 것 없이 잠실구장 외야 상단에 꽂히는 홈런이 백미였다.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 홈런은 전무후무한 기록이고, 앞으로도 다시 생기긴 쉽진 않을 것이다. 일단 7차전까지 시리즈가 흘러가야 하고, 그 7차전의 9회말까지 동점 상황이 유지되어야 하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홈런을 쳐 내야 하고…. 여러 확률을 따질수록 나지완은 천운을 타고난 사나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최근 결혼하여 가정까지 꾸렸다고 하니, 그 운이 타이거즈와 영원히 함께하기를.

2009년의 주인공이 나지완이었다면 올해의 주인공은 단연 양현종이다. 지금이야 결과가 다 나왔으니 편하게 말할 수 있지만, 1차전을 베어스가 이기고 눈앞이 캄캄했다. 2차전 상대 선발은 타이거즈에 강한 장원준이었으니, 양현종이 삐끗하면 홈에서 2판을 내리 지고 서울에 올라갈 판이었다.

알다시피 양현종은 완봉승을 거둔다. 앞서 나지완의 경우까지는 아니겠지만 한국시리즈에서의 완봉도 흔한 기록은 아니다. 그래도 그건 그렇다 치자, 2017년 프로야구의 마지막 경기가 된 5차전, 9회말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의 과정은 어떤 작가가 드라마나 영화로 썼으면 개연성 없다는 핀잔을 들을 만한 스토리였다. 7:0에서 7:6이 되고, 수비 실책으로 1사 만루가 되어 버린 상황. 마운드에는 2차전 완봉으로 시리즈 전체의 기세를 바꾼 에이스가 있다. 점수가 날 수 있는 수많은 변수들을 뒤로하고, 양현종은 유격수 뜬공, 포수 파울플라이로 두 타자를 요리한다. 그렇게 우승.

타이거즈의 팬이라면 경기장에서나 라이브 중계로 함께했을 것이고, 재방송 또한 무수하게 다시 보았을 이야기를 왜 다시 풀어놓느냐고 묻는다면, 그저 좋아서 하고 또 하는 우승 뒤풀이라고 답하겠다. 며칠 전에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는 야구의 몇 장면을 다시 반추하고 수다로 부려 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뜨거운 스토브리그 뉴스를 들여다보면서, 우승 팀으로서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선수들의 인터뷰처럼 우승의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고, 이렇게 우승 후에 맞이하는 겨울이 내년에도 다시 올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 타이거즈 팬들은 최소한 올겨울까지는 뒤풀이를 즐길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매일 일희일비하느라 속을 태웠던 팬들에게 이보다 더한 축복과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기아가 우승을 확정한 그날 밤, 나는 고민 끝에 사장님의 문자에 답장을 보냈다.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는 함께 야구장에 가시지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쩐지 우승 팀의 팬으로서, 야구는 언제 어떻게 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은 호기가 생긴 것 같다.

그러나 내년 일을 올해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내년 어느 날, 잠실구장 한구석, 죽상을 한 채 보스 옆에 앉아 패배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팬들이여, 조금 더 뒤풀이를 즐기자. 정작 즐기고 싶을 때 갑작스레 젊은 선수가 SNS에 사고를 친다든지, 믿었던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을 한다든지, 팀에 충성을 다하던 노장 선수가 방출된다든지…. 팬들을 식겁하게 하는 일이 이 판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나니까, 그저 지금의 뒤풀이를 즐길 뿐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