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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맛있는 이야기’] 명란젓
2017년 10월 12일(목) 00:00
국내 최대 규모의 국제수산물도매시장과 거대한 냉동 창고가 밀집해 있는 부산 감천항. 이곳에서는 해마다 2월부터 5월 사이 흥미로운 수산물 국제 거래가 이루어진다. 바로 명태 알인 명란이다.

무분별한 남획과 지구온난화로 흔하디흔한 생선이었던 명태가 우리 바다에서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 명태는 이제 러시아 수역인 오호츠크해와 미국 수역인 베링해에서만 잡힌다. 따라서 미국과 러시아는 개체 보호를 위해 명태의 어획량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오호츠크해와 베링해에서 잡을 수 있는 명태의 양은 연간 250만 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명란의 양은 2% 정도인 5만 톤. 그중 3만 톤은 러시아가, 2만 톤은 미국이 생산한다. 미국에서 생산된 명란은 전량 미국에서 거래되지만 러시아에서 생산된 3만 톤의 명란은 생산 즉시 부산 감천항으로 옮겨 와 거래가 이루어진다. 감천항이 가진 우수한 냉동 설비와 저렴한 통관 및 보관 비용 때문이다.

명란을 소비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단 두 나라. 러시아에서 생산된 3만 톤의 명란 가운데 한국은 5천 톤을, 일본은 2만5천 톤을 구매한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에서 생산된 2만 톤까지 전량 구매해 연간 4만5천 톤을 소비한다. 일본은 이렇게 구매한 4만5천 톤 전부를 명란젓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반면, 한국은 5천 톤마저도 젓갈용과 알탕용로 나눠서 사용한다. 소비하는 양만 보면 열 배 이상 많은 일본이 명란젓의 종주국으로 보일 만하다. 하지만 명란젓의 종주국은 엄연히 한국이다. 일본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인정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조선은 부산항에 이어 1880년 원산항을 개항한다. 당시 원산항은 명태의 최대 집산지였다. 원산항으로 이주해 온 일본 상인들은 명태를 말려 황태나 북어로 먹는 조선인 특유의 식습관을 목격한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뛰어들던 그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명태잡이와 가공 사업을 독점하고 조선인은 명태를 가공하는 노동자로 전락시켰다. 일본 상인들은 명태나 명태의 부산물을 임금 대신 지급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런데 의외로 큰 저항이 없었다. 이유를 살펴보니 조선인 노동자들은 임금 대신 받은 명태와 부산물을 모아 살코기로는 식혜, 알로는 명란젓, 아가미로는 서리젓, 창자로는 창란젓을 만들고 있었다.

적잖이 놀란 일본 상인은 그중에서 특히 명란젓에 주목했다. 일본인은 예로부터 날치, 청어, 연어 등의 알을 다산과 다복의 상징으로 여겨 즐겨 먹었다. 그들은 명란젓 역시 같은 개념으로 이해했다. 원산에서 만든 명란젓은 항아리에 담겨 부산을 거쳐 일본 시모노세키항에 닿았다. 당시 이를 독점하다시피 했던 ‘히구치상회’는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에 명란젓을 보관하는 저장 시설을 따로 둘 정도로 만만찮은 규모였다. 비록 일본 상인에 의해 시작되긴 했지만 명란젓은 우리나라 수산물 가공식품 수출 1호 목록에 올려도 손색없을 것이다.

명란젓이 다양한 젓갈 중에서도 유난히 비싼 이유는 원재료인 명태 알의 가격이 비쌀 뿐만 아니라 제조 과정 역시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명란젓은 해동, 1차 조미, 2차 조미의 순서로 만들어진다. 우선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명태를 잡자마자 배에서 바로 알을 꺼내 급속 냉동을 시킨다.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유통시키기 위함이다. 이렇게 냉동된 명태 알을 해동시키는 데만 하루가 걸린다. 냉동 이전의 신선한 상태를 복원해야 하는 까닭에 온도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해동된 명태 알은 소금물에 절여 1차 조미를 한다. 과거에는 높은 염도에 장기간 숙성시켰으나 요즘은 기술의 발달로 낮은 염도에서 1∼2일 정도로 충분하다. 1차 조미가 끝난 명란은 조미액에 담가 2∼3일 정도 숙성을 시킴으로 완성된다. 같은 명태 알을 사용함에도 제조사마다 맛이 다른 이유는 2차 조미 시 사용되는 조미액이 제조사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재래식 명란젓은 양념을 발라 숙성시켰으나 요즘은 외관상 깔끔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조미액에 담그는 방식을 선호한다.

시장규모 면에서 굳이 일본을 이기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명란 종주국의 위상을 되찾자면 최소한 그들보다 명란을 자주, 그리고 다양하게 즐길 줄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만 꼭 기억하도록 하자. 첫째. 알의 형태와 크기에 집착하지 말자. 일반적으로 명란은 알의 형태가 완전하고 크기가 클수록 비싸다. 이는 외관을 기준으로 한 상품성의 차이일 뿐 맛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크고 비싼 명란을 고집하느니 차라리 작고 저렴한 명란을 자주 드시는 편이 낫다. 자주 먹다 보면 맛에 대한 기준도 자연스레 형성된다.

둘째. 명란젓이 짜다는 선입견은 버리자. 재래식 명란은 염도가 7∼15% 정도로 높지만 최근에는 염도 4%대의 저염 명란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대신 염도 7% 이상인 명란은 냉장 상태에서 40일 이상 유통이 가능하지만 저염 명란은 7∼10일이 고작이다. 그래서 저염 명란은 대부분 냉동 상태로 유통된다. 염도가 높고 자칫 방부제 같은 첨가물이 사용되었을지 모르는 냉장 명란보다는 차라리 염도가 낮고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은 냉동 명란이 오히려 안전하다.

햅쌀이 나오는 계절이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낟알이 선명하게 살아 있는 하얀 쌀밥 위에 올린 명란 한 점을 상상해 보시라. 이 가을에 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단언한다.

〈맛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