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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의 창] 만리장성 동쪽 끝이 북한?
2017년 08월 03일(목) 00:00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여름 정기답사로 실크로드를 다녀왔다. 청해(靑海)성 서녕(西寧)에서 버스를 타고 서북쪽으로 초원지대를 달려서 감숙(甘肅)성 돈황(敦煌)까지 갔다가 동남쪽으로 돌아서 감숙성 난주(蘭州)까지 내려오는 여정이었다.

돈황에서 난주까지 가는 길이 바로 옛 중국의 수도 장안(長安:서안)으로 통하는 유명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다. 하서(河西)는 황하 서쪽이란 뜻이고 주랑은 긴 회랑이란 뜻인데, 남쪽으로는 만년설이 덮여 있는 기련산맥(祁連山脈)과 북쪽으로는 여러 산과 사막이 이어지는 중간의 평지로 약 9백km에 달한다. 하서주랑은 때로는 동서문명이 교류하는 실크로드지만 때로는 흉노 같은 북방 기마민족의 침공로가 되었다.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를 중국에서는 추고마비(秋高馬肥)라고 한다. 우리는 천고마비를 독서의 계절이란 뜻으로 쓰지만 중국에서는 ‘송사’(宋史) ‘이강(李綱)열전’에 “(저들이) 추고마비에 다시 와서 우리 강역을 어지럽히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북방 기마민족이 살진 말을 타고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의 곡식을 빼앗으러 오는 시기라는 뜻으로 썼다.

돈황에서 조금 내려오면 주천(酒泉)이라는 시가 있다. 한(漢) 무제의 부인 위(衛)황후의 조카인 곽거병(서기전 140∼서기전 117)과 관련이 있는 도시다. 한나라는 매년 흉노에게 막대한 재화를 주고 평화를 샀는데, 표기장군 곽거병이 한 무제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 흉노 정벌에 나서 이곳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 무제가 술을 하사하자 곽거병은 전 군사와 함께 마신다면서 이 술을 우물에 부어서 나누어 마셨다. 그래서 ‘술샘’이라는 뜻의 주천(酒泉)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2100년 전 흉노 정벌 사건을 아직도 도시 이름으로 삼고 있는 것은 현재 중국인들의 역사관을 잘 말해 준다.

이 주천시 근처에 만리장성 서쪽 끝의 한 관문인 가욕관이 있다.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으로 불리는데 정작 쌓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주원장의 홍무(洪武) 5년(1372)부터이다. 이곳에 있는 장성박물관에서는 각 시기별 만리장성의 길이를 보여 주는 슬라이드 지도를 상영하는데, 진나라 때 만리장성 동쪽 끝은 평양 부근까지다. 한국 사람들은 ‘언제 만리장성이 북한까지 온 적이 있었는가?’라고 놀라지만 ‘만리장성 동쪽 끝=북한’은 중국만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인식이다.

그 뿌리는 역시 조선총독부로서 일제강점기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된다”라고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해방 후 이른바 국사학계(?)의 태두(泰斗)라는 이병도 서울대 교수가 이를 그대로 추종했고, 현재까지도 국내 강단사학자들이 따르는 바람에 항의 한번 못해 보고 만리장성이 북한까지 늘어진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한 것이 대부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이런 그릇된 역사 인식을 아직까지 한국 학계가 추종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은 2012년 ‘한·중 경계의 역사적 변화’(CRS)라는 자료집을 미 상원에 보냈는데, ‘한사군=북한 지역’을 논리로 북한이 중국사의 영역이었다는 내용의 자료다. 미 상원에서 이 자료를 한국 정부에 보내 반박하라고 했더니 이명박 정권 당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독도를 끝내 그리지 않아서 문제가 된 ‘동북아역사지도’ 제작 측 대표였던 교수 등이 국민 세금으로 미 상원까지 가서 ‘한사군의 남쪽 한계는 황해도 재령강 연안과 강원도 북부’라는 한국 입장을 전달하고 왔다. 지금으로서는 북한 유사시 중국이 황해도∼강원도 북부까지 차지하고 동북 4성으로 삼아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북한 강역을 중국에 그대로 넘겨준 이런 행위의 배경이야말로 적폐 중의 적폐일 것이지만 대부분의 보수 언론은 물론 진보 언론까지도 조선총독부 역사관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묵살되고 있는 형편이다. 함석헌 선생이 “깨어 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말한 것이 비단 1960년대에만 국한되는 상황은 아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