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광주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가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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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광주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가을을 보내며
2016년 11월 02일(수) 00:00
시절이 심란해선지 계절조차 가을답지 못하다. 봄·여름의 모든 것들이 가을의 결실을 대비했기에 오롯한 사색을 위한 따스한 햇살 한 조각, 삽상한 바람 한 올이 아쉬운 시간이다. 그런데 세간의 어지러움에 멍든 가슴들이 도처에 산재해선지 유난히도 우수(雨水)에 젖은 가을을 보내며, 사막에 선 어린 왕자의 심정으로 주위를 돌아본다.

정성을 다해 돌보던 장미와 다툰 뒤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고 떠난 여행, 결국 지구에 이르렀지만 도착한 곳은 아무도 없는 사막이었다. 사막에서 우연히 만난 뱀에게 ‘이곳은 무척 쓸쓸하다’고 심경을 토로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란다. 사실 어린 왕자가 도착한 곳이 황량한 사막이라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장미가 5000송이나 피어 있는 정원이 있고, 특급 열차가 다니는 역도 있고, 도르래와 물통이 있는 샘도 있으니 말이다.

뱀과 헤어진 어린 왕자는 장미 정원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의 별에다 두고 온 꽃이 수많은 장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에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이때 나타난 여우로부터 ‘길들이는 법’, 즉 ‘관계를 맺는(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길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이 된다는 것, 즉 어떤 대상과 사랑하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깨우침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를 어느 조종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렸는데, 어른들이 모자로만 보아서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조종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비행기 고장으로 불시착한 사막에서 어린 시절 그림을 제대로 이해해 준 어린 왕자를 만나고서야 진실한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장미와 헤어진 어린 왕자도 지금껏 권위적인 임금, 허영심 많은 남자, 주정뱅이 등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만 만났을 뿐이었다.

‘사랑’은 사량(思量· 생각의 양)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사막 같은 공간에서 타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장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장미를 위해 정성들인 시간’임을 깨달음으로써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것의 소중함은 오직 그것과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서 생겨나기에, 사랑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이루게 된다.

신영복 선생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靜的平面)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라고 했다. ‘한편이 되어 백지 한 장이라도 맞들어 보고, 반대편이 되어 헐고 뜯고 싸워보지 않고서 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흡사 냄새를 만지려 하고, 바람을 동이려 드는 것과 같은 헛된 노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 개의 나무 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의 연대’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옆 사람을 단지 36.5℃의 뜨거운 열 덩어리로만 느끼고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보아뱀 그림을 몰라주는 사람들 앞에서 조종사는 원시림이나 별에 대해서는 이야기 못하고,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카드놀이나 골프, 정치와 넥타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야 ‘어른’들은 재치 있는 사람을 만났다며 흡족해 했다. 진정한 사랑이나 배려 없이 자기 욕망으로만 타인을 바라보는 현실을 비판하여,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인간들의 세계에는 우정을 파는 상점이 없다’고 말했다.

성큼 다가선 겨울 앞에서 이 가을을 공허함과 조락(凋落)으로 마무리하지 않으려면, 어린 왕자와 함께 관계 맺음의 의미를 돌이켜 보는 것이 좋겠다. 장미를 떠나온 것을 후회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예요. 당신의 장미에게 당신은 책임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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