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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剩餘)에 대한 단상(斷想)
김 창 균
광주시교육청 장학사
2014년 07월 02일(수) 00:00
카프카의 소설 ‘가장의 근심’에 등장하는 ‘오드라덱’의 정체가 궁금했다. 언뜻 보기에 별 모양을 한 납작한 실패처럼 생긴 그것은 몇 달 동안 안보이다가도 홀연 나타난다. 말을 걸어도 좀처럼 대답하지 않지만 이름을 물으면 “오드라덱이에요.”라고 대답하고, “어디에 사니?”라고 물으면 “아무 데나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전부다.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지만, ‘내’가 죽은 후까지도 살아있으리라는 상상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다.

손창섭은 1958년 발표한 소설 ‘잉여인간’에서 부조리한 전후(戰後)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삶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상실한 무기력한 사람들을 ‘잉여인간’이라 칭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우리 사회는 새로운 ‘잉여(剩餘)’들에 둘러 싸여 있다. 넘치는 인력의 적절한 활용과 노동 분배에 대한 뾰족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잉여를 자처하거나 상대를 잉여로 비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18세기 말의 산업혁명은 장인적인 육체노동을 분해하여 기계에 넘기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노동 자체를 탈숙련화하고 단순화했다. 이제 작금의 새로운 산업혁명은 육체노동에 이어 정신노동을 기계화하고 있다. 문화비평가 최태섭은 ‘잉여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리라 믿었지만, 현실은 노동의 양극화로 나타났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과거 10명이 할 일을 혼자 떠맡게 된 한 사람이 과로로 죽어가는 동안 다른 9명은 손가락을 빨고 있는, 누군가가 과로로 쓰러질 때만 나머지 9명 중 1명에게 과로할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잉여사회라고 말한다.

문제는 과학의 발전이 잉여의 문제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기계가 융합하는 싱귤래리티 이론으로 유명한 레이 커즈와일은 1998년까지 컴퓨터가 체스 챔피언을 이길 거라 예측했는데, 1년 앞서 IBM의 딥블루가 실현하였다. 그는 2029년까지 컴퓨터가 인간 지능을 추월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앞으로 불과 15년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워싱턴포스트가 뽑은 ‘로봇이 대체할 직종 8가지’를 보면 눈에 띄는 직업이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 기술로 트럭 운전사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수 있다고 했으며, 의류 생산과 물류·유통 전반에 로봇·IT 자동화가 확산되기에 의류 판매자를 위험 직군으로 꼽았다. 낮은 수준의 연구 활동을 하는 연구원들도 위험 직군으로 분류되었는데, 그 근거로 혈액 샘플을 분류하고 색인할 수 있는 로봇 개발을 예로 들었다.

최태섭은 ‘잉여사회’의 글머리에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대사를 인용하였다. “대학 못 가면 잉여인간이야, 인간쓰레기 되는 거야!” 영화의 배경인 1978년만 해도 대학 진학은 사회의 주류로 나아가는 절대적인 기회와도 같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신노동이 기계화되면서 생산성은 견고하고 지속적으로 증가하지만 고용은 시들해지고 있음을 각종 통계가 증명하고 있다. 언제까지 ‘입시 준비→대학→스펙 쌓기→취업’이라는 공식이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교범(敎範)으로 통할지도 의문이다.

발터 벤야민이 오드라덱을 ‘사물들이 망각한 상태 속에서 갖게 되는 형태’라고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기이하기만 생각했던 오드라덱은 ‘잉여’의 메타포(metaphor)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소설 속 화자의 걱정과 달리, 스스로 잉여임을 자처하는 현대의 자발적 잉여 세대는 나름의 해법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렇다면 잉여는 현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자발성과 엉뚱함을 바탕으로 창조적 미래를 이끄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월간잉여’의 잉집장(잉여+편집장) 최서윤 씨의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노동 유연성이 높아지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적은 사람으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게 됐다. 대다수가 잉여로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즐거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