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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2014년 05월 07일(수) 00:00
지난해 5월, 모스크바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의 일리아 레핀 작품 앞에서 한동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No one waited for him· 1884년 작)라는, 다소 슬픈 제목의 그림 때문이었다. 오래전 도록에서 봤던 작품이었지만 막상 ‘진품’을 보니 더 가슴이 먹먹했다. 인간의 내면심리를 함축적으로 묘사한 ‘아무도…’는 러시아의 사실주의 거장 일리아 레핀의 대표작이다. 시대적 배경은 볼셰비키혁명의 폭풍이 휘몰아치던 19세기 말. 혁명전선에 몸을 던진 주인공은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가장의 갑작스런 ‘컴백홈’은 가족의 평안한 오후를 깨뜨린다. 오랜 시간 가장의 부재(不在)에 ‘익숙해’ 있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에선 반가움 보다 긴장감이 흐른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가족사를 그린 ‘아무도…’는 오늘날 러시아의 ‘국보’로 대우받는다. 매년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에는 전 세계에서 ‘아무도…’를 보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아무도…’가 러시아의 아이콘이라면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고발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년 작·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소장)는 세계의 ‘유산’이다. 작품의 배경은 1937년 4월26일 독일의 공군기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해 7000명의 민간인을 살상한 사건이다. 당시 파리에 서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한 달 동안 작업에 몰두해 ‘게르니카’를 완성시켰다. 무채색의 묵직함과 흑백의 대비는 전쟁의 공포와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난 2006년 영국 가디언 지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시 오월이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광주에서도 수많은 화가들이 5·18 민중항쟁의 참상을 증언한 작품들을 쏟아냈다. 작가들은 광주의 아픔과 가려진 진실을 걸개그림이나 판화, 벽화로 절절하게 표현했다. 강연균 화백의 ‘하늘과 땅 사이 II’, 신경호의 ‘그대의 눈물 속에’, 홍성담의 ‘오월-02-횃불행진’ 등이 대표적이다. 광주의 ‘그날’을 되살려 낸 이들 작품은 한국적 리얼리즘의 지평을 여는 등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크다. 지난 2007년부터 광주시립미술관이 오월항쟁과 민주·평화·인권을 중심으로 민중미술컬렉션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민중미술컬렉션은 아직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광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차별화된 콘텐츠이지만 전국화, 세계화는 요원해보인다. 광주시립미술관의 브랜드 마케팅과 체계적 연구가 부족한 탓이다. 이젠 오월 작품들을 수집하는데 만족하지 말고 이들을 ‘글로벌 콘텐츠’로 키울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때로 한 장의 그림은 그 어떤 메시지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게르니카’가 존재하는 한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 잊혀지지 않는 것 처럼. 그게 바로 예술의 힘이다.

〈편집부국장 겸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