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공간 - 윤희철 생태도시리빙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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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공간 - 윤희철 생태도시리빙랩 소장
2026년 03월 09일(월) 00:20
어떤 도시는 혁명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파리는 프랑스 혁명의 도시이고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도시이며 서울은 거리의 시민이 정권을 바꾼 도시다. 우리는 이런 도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는 이미 쟁취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묘한 불편함도 느낀다. 선거는 있지만 참여는 번거롭고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공간’에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제도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 그리고 그 경험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매일 오르내리고 통과하고 머무는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상징적인 장소에서 찾는다. 광장, 기념관, 혁명 유적지 같은 곳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오히려 그보다 훨씬 작은 공간에서 형성된다. 시청에 들어설 때 느끼는 분위기, 민원을 보러 갔을 때 서게 되는 위치,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같은 것들이다. 이런 사소한 경험들이 쌓여 우리는 민주주의를 몸으로 배우거나 혹은 멀어지게 된다.

생각해보자. 많은 도시의 시청사 메인홀은 어떤가. 천장은 높고 공간은 넓으며 중앙에는 계단이나 거대한 구조물이 있다. 민원인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게 되고 직원은 유리나 벽 너머에 있다. 이 공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기는 네 공간이 아니다.” “너는 요청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판단하는 사람이다.”

이런 공간을 매번 통과하면서 시민은 무언가를 배운다. 말은 조심해야 하고 오래 머물면 안 될 것 같고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민주주의는 법적으로는 시민의 권리일지 몰라도 공간적으로는 여전히 허가받아야 하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가 공간을 통해 재생산되는 방식이다.

거대한 도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개 넓은 도로를 ‘발전의 상징’으로 배워왔다. 하지만 그 도로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머무르지 않는다. 대화하지 않는다. 서둘러 건너고 다시 흩어진다. 보행자는 신호를 기다리는 객체가 되고 도시는 통과해야 할 경로가 된다. 이런 공간은 시민을 관계 맺는 존재가 아니라 이동하는 단위로 취급한다.

민주주의는 속도보다 숙의가 필요하고 통과보다 체류가 필요하다. 그런데 거대한 도로와 교차로 중심의 도시는 그 반대의 감각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여기는 멈출 곳이 아니다.” “이야기할 곳이 아니다.” 이렇게 도시가 움직이면 시민이 일상에서 정치적 존재로 살아가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정말 혁명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혁명 이전의 공간 속에서 민주주의를 연기하고 있는가. 제도는 바뀌었지만 공간은 그대로라면 시민의 태도 역시 완전히 달라지기 어렵다. 권위주의를 전제로 설계된 공간은 한 번 만들어지면 수십 년, 수백 년을 간다. 그 공간에 익숙해진 시민은 자신도 모르게 그 질서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지속가능한 도시’라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속가능성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보행 중심의 거리, 낮은 문턱의 공공건물, 작은 광장과 쉼터, 질문하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날수록 민주주의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폭발하지만 시청 로비와 거리의 광장, 공원에서 유지된다. 혁명은 한 번 일어나지만 일상은 매일 반복된다. 그래서 도시가 바뀌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쉽게 체감하기 어렵다. 반대로 말하면 도시를 바꾸는 일은 곧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일이다.

우리가 묻지 않아도 되는 도시, 머물러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 토론이 자연스러운 건축과 거리. 그런 도시에서라면 민주주의는 굳이 외치지 않아도 작동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혁명이 아니라 공간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도시는 말을 하지 않지만 늘 우리에게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가능한지를 가르친다. 우리가 어떤 시민이 될지는 우리가 어떤 공간에 매일 발을 디디고 살아왔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는 결국 그렇게 익숙해진 공간에서 조용히 호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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