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하미마을의 눈물 - 정근식 서울대 명예교수
2024년 02월 27일(화) 00:00
희망의 계절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1968년 베트남의 봄은 잔인했다. 한국에서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으로 어수선했을 때, 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 월맹군의 뗏(설)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한국군과 미군은 치열한 반격작전을 전개했는데, 특히 중부지역의 농촌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대보름 전날인 2월 12일, 다낭에서 가까운 꽝남성 퐁니·퐁넛마을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이곳은 월남군의 가족들도 살고 있는 안전마을이었지만, 부비트랩 용의자를 찾는다고 이 마을에 들어간 한국군에 의해 주민 74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건 직후 미군 병사가 마을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2월 24일, 한국군 대대본부에 가까운 해변마을 하미에서 똑같은 비극이 발생했다. 평소에 친절했던 ‘따이한’이 아침 일찍 주민들을 모았는데 주민들은 혹시 식량이나 선물을 주려나 기대했지만, 기관총과 수류탄 세례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35명이 희생되었는데, 대부분은 노인과 부녀자들이었고 열살 미만의 어린이가 59명이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울며불며 시신 조각들을 모아 봉분을 만들었지만 그것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3월 16일, 꽝응아이성 미라이마을에서 훨씬 더 큰 참극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미군들에게 적어도 347명, 많으면 504명이 희생되었다. 미라이의 비극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반전평화운동에 불을 지폈고, 베트남의 운명을 바꾸어버렸다.

이 비극을 겪은 이후 베트남인들은 유령처럼 떠도는 원혼을 위해 담 안팎에 작은 제단을 만들고 향을 피웠다. 기어츠상에 빛나는 인류학자 권헌익교수가 언급했듯이 이곳은 걸인이나 부랑자, 심지어 적군일지도 모를 유령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의 친인척 또한 잘 모셔줄 것이라고 믿는 만큼 이들도 정성스럽게 피안의 공간을 마련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베트남 지방정부와 주민들은 미라이학살의 진실을 기억하기 위한 역사관을 만들었고, 미국 참전군인들과 시민단체가 이 마을에 많은 지원을 했다. 한국군에 의한 비극과 주민들의 고통은 뒤늦게 1999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고, 2001년 하미마을에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지원으로 위령비가 세워졌다. 주민들은 전면에 희생자들의 명단을, 후면에 참상의 기록과 함께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새겼다. 그러나 학살이라는 표현 때문에 후면은 연꽃무늬 그림으로 덮였다. 퐁니·퐁넛의 위령비는 2004년 당산나무가 있는 피해의 현장에 한국의 시민단체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비극적 사건들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2023년의 봄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전향적 판단과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는 관행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작년 2월 7일 서울지방법원은 ‘퐁니·퐁넛 학살 사건’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베트남 마을 민병대원 등의 증언과 그밖의 여러 증거를 바탕으로 원고의 주장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하고 한국정부가 보상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역사적인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5월 2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하미마을 유족들이 신청한 진실규명에 대하여 이 사건이 위원회의 조사범위 밖에 있다고 판단하고 각하했다.

한국 사법부의 판결과 엇갈린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은 한때 진실규명의 책임자로 일했던 나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유족들을 위로하고 희생자들에게 작은 사과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올해 초에 용기를 내서 현장을 찾았다. 퐁니위령비를 지키는 야유나무는 만시지탄이라며 잉잉거렸다. 하미에서는 유족 응우엔 럽을 만나 ‘올 봄에 저는 못가요’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의 어머니 팜티호아는 열 살 아들과 다섯 살 딸을 잃었고 자신도 두 발을 잃고 한국을 원망했지만, 10년전 “이제 그만 용서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뢰사고로 앞을 보지 못하는 그의 눈물이 내 가슴에 뜨겁게 흘러내렸다. 용서라는 말보다 더 큰 아픔은 아직도 한국인을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유족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 베트남은 한국의 최대 무역 흑자국이고 가장 중요한 국제결혼 상대국으로 발전했지만, 유족들의 마음 깊숙이 남아있는 증오를 지우고 진정한 화해를 달성하려면 우리가 좀더 멀리 보고 분발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했다. 이들은 새해 복많이 받으라고 하면서 작별인사를 했지만 나는 끝내 올해가 청룡의 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잔인한 2월의 기억이 하미마을을 다시 한번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