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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잿더미서 과거 딛고 일어선 독일인 심리 그려 - 늑대의 시간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2024년 02월 03일(토) 22:00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모습을 접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을 떠올린다.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사진은 참회와 반성에 기초한 독일 역사 인식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하지만 독일인들 역시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를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은 채 집단의식에서 배제시켜왔다. 그들은 1963년 진행된 아우슈비츠 재판에서야 비로소 당시 저질렀던 범죄와 대면하기 시작했다.

저널리스트이자 베를린예술대학 명예교수인 하랄트 얘너의 ‘늑대의 시간’은 독일이 패망한 1945년 5월 8일부터 1955년까지 10년 동안 전후 독일인이 겪은 일상과 심리를 분석한 역사서다. 부제는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책 제목 ‘늑대의 시간’은 ‘다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을 쓰는’ 이 시기를 일컫는 말로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는 공식 문서와 출간된 책, 일기, 수기, 문학작품, 신문, 잡지, 영상자료, 유행가 가사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졌을 지도 모를 당시 평범한 독일인의 생활상과 심리를 펼쳐보인다. 패망 후 독일이 맞닥뜨린 현실은 참혹했다. 약 5억㎥에 달하는 폐허 더미와 함께 폭격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대피한 900만 명, 난민과 실향민 1400만 명, 강제 노역과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 1000만 명, 전쟁 포로로 잡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 수백 만명이 뒤섞인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은 독일의 사회적 개념을 뒤흔들어 놓았고 도덕적 붕괴는 극심했다. 먹을 것을 조달하기 위한 약탈, 암거래, 좀도둑질이 이어졌고 시골로 떠나는 ‘도둑질 투어’도 만연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 댄스홀은 문전성시였고, 파티를 즐기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눴다.

반면 과거 반성은 없었다. “생존 욕구는 죄책감을 차단”하기에 독일인 역시 책임을 회피하고 스스로를 희생자, 피해자라 여겼다.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생각은 그들의 의식속으로 음험하게 파고들었고, 전범들을 단죄하려 열렸던 1945년의 뉘른베르크 재판은 과거사 청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자는 다수 독일인이 개인적 책임을 거부했음에도 독일에 민주주의 정부가 세워지고, 자기 반성이 이뤄진 것을 기적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사실 억압은 항상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지속적인 과거 청산의 일부”라는 한 외신의 평처럼 정확한 사실과 어두운 실상, 아픈 상처까지도 정확하게 드러내며 독일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 <위즈덤하우스·2만8000원>

/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