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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를 묻는 시대- 이국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2023년 06월 27일(화) 00:00
“우리 아부지가 ‘너는 고생하지 말고 비단처럼 편히 살아라’ 해서 이름 한자에 비단 금(錦)을 썼던가 봐. 그래서 내 이름이 양금덕이여.”

양금덕 할머니는 1929년 나주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1년으로 2년 늦게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병원도 없고 약도 귀할 때라 아이들이 아파도 손도 못 써보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켜보다 한두 해 늦게 올리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었다.

양 할머니가 태어날 때,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신음하는 식민지였다. ‘비단처럼’ 살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염원은 어쩌면 이런 어두운 시대를 탈 없이 비켜 가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는 아버지의 바람처럼 되지 않았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마침내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시작했다. 급기야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하와이 진주만을 급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벌였다. 그야말로 이성은 마비되고 살육의 광기만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했다. 말 그대로 전쟁을 위해 ‘물자’도, ‘사람’도 닥치는 대로 뽑아 ‘총동원’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일제의 군홧발 아래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처지야 두말 할 것 없었다. 조선은 일본의 병참 기지, 즉 보급 창고였다.

양 할머니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내내 ‘급장’을 놓치지 않았다. 뭣이든 남한테 뒤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학적부에는 매년 우수상을 받은 내력으로 빽빽하다. 하지만 전쟁의 광기는 어린아이들이라고 해서 비켜 가지 않았다.

양 할머니는 1944년 5월 말 일본 길에 나섰다.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해서 상급학교도 갈 수 있다” “일본에 가지 않으면 너 대신 부모를 감옥에 가두겠다”는 일본인 교장의 회유와 강압 때문이었다. 나주초등학교 6학년, 열네 살 때의 일이다.

일본에서의 강제 노동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해방 후 구사일생으로 고향에 돌아왔지만, 또 다른 아픔이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온 이들을 멀리했다. 미쓰비시 비행기 공장에서 죽도록 일했다 해도 도무지 믿지 않았다. 일본에 갔다 온 것만으로 곧 일본군 ‘위안부’로 여겼기 때문이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어도 번번이 외면당했다.

결국 어떤 할머니는 평생 결혼을 포기한 채 홀로 살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또 다른 어떤 할머니는 이미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의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가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다”는 부모의 만류 때문이었다.

어렵게 가정을 이뤘더라도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소문을 알게 된 남편은 “속아서 결혼했다”며 날마다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부인을 두고서도 대놓고 두 집 살림을 차리거나, 가정 불화 끝에 끝내 이혼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양 할머니는 지난해 9월 집을 찾아온 박진 외교부 장관한테 쓴 편지에서 “지금까지 흘린 눈물로 배 한 척을 띄우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 3월 6일 미쓰비시, 일본제철 등 일본 피고 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지불해야 할 배상금 대신 피해국인 우리 정부가 그 책임을 대신하겠다는 소위 ‘제3자 변제’ 방안을 발표했다. 즉 우리 기업으로부터 뜯은 ‘기부금’을 ‘배상금’ 대신 ‘판결금’이라는 포대 갈이를 통해 피해자와 유족들한테 지급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통 큰 결단’이라고 밝혔다.

양금덕 할머니는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고 물었다. 양 할머니한테는 어린 아이들을 끌고 간 그때의 일본이나, 일본을 위해 피해자들의 인권을 내다 판 지금이나 하등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가 대통령한테 “어느 나라 대통령이냐”를 묻고 있는 시대,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