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야생차밭 - 정범종 작가
  전체메뉴
광주의 야생차밭 - 정범종 작가
2023년 03월 28일(화) 00:30
광주에 야생차밭이 있다. 사람들은 무등산에 있을 거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어등산에 있다.

광주의 해돋이산은 무등산이고 해넘이산은 어등산이다. 무등과 어등, 등등으로 운이 맞는다. 무등산은 거대하게 뭉쳐 있고 어등산은 넉넉하게 풀려 있다.

어등산에서 야생차밭이 있는 곳은 절골이다.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생소할 텐데, 어등산 절골은 지금 골프장이 있는 곳이다.

나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차나무를 보고 자랐다. 고향인 보성군 득량면에는 다전(茶田) 마을이 있고 고향 마을인 못골(池洞)에도 대밭에 차나무들이 있다. 보성 회천면 봇재의 다원에도 자주 갔다. 그래서 차밭을 보면 정겹다. 당연히 이십여 년 전에 어등산 절골의 야생차밭을 처음 만났을 때도 반갑고 정겨웠다. 여기서 수십 명이 차 싹을 따고 있는 걸 봤을 때는 더욱더 그랬다.

광주에서 살면서 봄에 차 싹을 딸 때만이 아니라 가을에 차꽃이 피었을 때도 어등산 야생차밭에 갔다. 이곳의 야생차밭은 한마디로 넓다. 축구장 대여섯 개에 해당하는 넓이이다. 이렇게 넓은 야생차밭을 광주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걸 나는 기쁨으로 알았다. 더구나 이곳에는 백 년이 넘은 차나무가 십여 그루나 있었다. 밑동이 내 손목 정도 되고 높이가 2m 안팎인 차나무들이었다. 다른 야생차밭에는 볼 수 없는 오래된 차나무들이었다.

어등산에서 시민을 위해 유원지를 만드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이 나오더니 공사판이 벌어졌다. 야생차밭의 밑자락을 뭉개고 골프장이 만들어졌다. 골프장은 야생차밭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야생차밭은 골프장에 의해서 밑자락만 훼손된 게 아니었다. 골프장 건설을 시작할 당시 누군가 백 년이 남은 차나무들을 파 갔다. 줄기를 톱으로 잘라내고 밑동과 뿌리만 가져간 걸로 보아서는 분재를 만든다고 그런 듯했다.

나는 분노하고 실망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실망을 이어가지 않으려고 차를 마셔댔다.

그렇게 지내는데 야생차밭에 백 년이 넘은 차나무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해도 맑게 사는 사람들이 재야에 있듯이.

나는 야생차밭을 찾아가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기대가 어긋나지 않아서 백여 년이 된 야생 차나무 두 그루를 발견했다. 두 그루 가운데 한 그루는 위로 서면 3m에 이르는, 한반도의 야생 차나무로서는 거목이었다.

나는 매년 백여 년이 넘은 이 차나무들을 보러 절골로 간다. 골프장에 길이 막혀 바로 갈 수 없으니까 먼저 산정동 가야저수지 위쪽에서 시작하는 산길을 타고 주능선으로 올라간다. 주능선을 한참 타고 가다가 절골로 내려간다.

그런데 야생차밭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서 사람들이 봄에 차 싹을 따러 오지 않자 숲이 무성해졌다. 으름덩굴이며 칡이 야생차밭을 덮고 산딸기나무 같은 떨기나무가 산길을 지웠다. 그래도 나는 매년 야생차밭으로 간다. 차 싹을 따서 황차를 만든다. 백 년 넘은 차나무 두 그루를 만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야생차밭에 있으면 골프장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매일 수백 명이 산행하는 어등산을 파헤쳐 만든 골프장에서 몇 명이 놀고 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수백 명을 외면하고 몇 명을 위해서 산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었다는 게.

이해할 수 없는 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준 기관도 없었다. 돈을 더 투입하면 좋은 유원지가 될 거라는 말은 들었다. 이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봄은 온다. 그러면 차 싹을 딸 때가 된다. 올해 봄에도 나는 어등산으로 갈 것이다. 야생차밭에서 차 싹을 따서 야생차를 만들려고.

내가 야생차를 만든다고 하면 주위에서 묻는다. ‘역시 야생차는 향기롭지요?’ 나는 아니라고 알려 준다. 향기로운 차는 다원에서 만들어진 차이다. 다원에서는 향기를 잘 내는 품종을 심기에 거기에서 나온 차는 향기롭다. 야생차는 예전부터 있어 온 차나무-품종 개량이란 걸 겪지 않은 차나무에서 비롯한 차여서 은은하다.

세상에서 은은함이 자꾸 사라져간다. 조금 남은 것이라도 나는 지키고 싶다. 은은하게 살기 위해서.

핫이슈

  • Copyright 2009.
  • 제호 : 광주일보
  • 등록번호 : 광주 가-00001 | 등록일자 : 1989년 11월 29일 | 발행·편집·인쇄인 : 김여송
  •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24(금남로 3가 9-2)
  • TEL : 062)222-8111 (代) | 청소년보호책임자 : 채희종
  • 개인정보취급방침
  • 광주일보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