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칼럼] 또 하나의 가족 - 주성필 전남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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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뇌혈관 질환 및 두부 외상 등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를 하고 있는 신경외과 의사다. 내가 담당하고 있는 환자 대부분은 중환자이기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환자를 돌보고 있었던 어느 날, 마음 아픈 경험을 했기에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겨울의 병동,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병동에서 회복 중인 환자가 한 명 있었다. 당시 코로나 상황에선 보호자 한 명만이 환자 간호를 위해 허용되는 상황이었다. 회진 중에 병동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가보니 젊은 여성 한 명이 어르신을 나무라면서 훈계하고 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사연을 알아본 즉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젊은 여성이 어머니가 뇌출혈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환자실에서 병실로 옮긴 후 이 어르신에게 환자를 잘 부탁한다며 간병을 부탁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상태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혼돈 증세가 심하고 말도 잘 못하는 중증의 상태였고 간헐적인 체위 변경이 필요하며 대변을 받아 내야만 하는, 실로 손이 많이 필요한 상태였다.
병실을 옮긴 후 딸이 찾아왔는데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 및 주변 환경이 썩 좋지 않아 불편한 마음을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전달하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환자는 옆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보호자들 또한 많은 집중도 및 수고로움을 필요로 하기에 상당히 피로도가 높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뇌졸중의 특성상 환자의 회복 기간이 길고 그 기간 동안 가족들에 많은 경제적인 부담과 심적 스트레스가 큰 건 사실이다. 특히나 급성기 시기엔 환자 가족들이 받은 고통은 매우 크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 환자의 딸 또한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수년 전에 부모님을 병원에서 치료하면서 간병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피를 나눈 내 식구가 아니기에 내 가족만큼 잘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근거 없으며 불안한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가족이 직접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불가피하게 간병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약간은 간병인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춰 줘야만 하는 절박하고도 솔직한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신경외과 환자의 특성상 간병인의 역할은 실로 대단하다. 대소변을 다 받아 내는 경우는 허다하고 의식이 없는 환자는 체위 변경까지도 해야 한다. 물론 간호사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의료 현실상 의료진에게만 의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환자의 덩치가 큰 경우에는 의료진 3~4명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가능한 경우도 많다. 자식으로서 환자의 상태가 궁금할라치면 의료진보다 간병인에 전화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경우에 간병인은 의료진의 말과 환자의 상태 등 둘 다 전화로 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해 줘야 한다. 만약 보호자가 느끼기에 전화 내용이 부족하거나 맘에 들지 않으면 위 경우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필자가 수련 기간이던 20여 년 전엔 환자 보호자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남편이 아프면 아내가, 부모가 아프면 자식이. 이런 가족 간의 사랑에 바탕을 둔 의무감으로 해왔던 일이였다. 하지만 가족 수가 줄고, 가족 간에 흩어져 살고, 고령화됨에 따라 가족 간의 보호자 역할은 줄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그 자리를 간병인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내가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대신 애써 주고 있는 사람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가족이 아닌 이상 하루 종일 환자와 함께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물론 거기에 대한 소정의 보상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홀대하거나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필자가 추측컨대 앞서 말한 환자 본인 또한 말은 못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너무나 씁쓸하고 마음이 아팠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가 아프든, 가족이 아프든 간에 우리가 죽기 전까지 병원 생활을 한 번도 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과 마음에 상처받은 환자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이 가족 중의 한 명이건, 간병인이건 간에 그 역할 자체가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기에 존경받아야 한다. 필자는 전공의들에게 늘 이런 말을 남기곤 한다. 간병인도 또 하나의 가족이기에 진심 어린 말투와 애정으로 보살펴 달라고.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겨울의 병동, 중환자실에서 며칠을 보내고 병동에서 회복 중인 환자가 한 명 있었다. 당시 코로나 상황에선 보호자 한 명만이 환자 간호를 위해 허용되는 상황이었다. 회진 중에 병동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서 가보니 젊은 여성 한 명이 어르신을 나무라면서 훈계하고 있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사연을 알아본 즉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필자 또한 수년 전에 부모님을 병원에서 치료하면서 간병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피를 나눈 내 식구가 아니기에 내 가족만큼 잘 해줄 수 있을까 하는 근거 없으며 불안한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가족이 직접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불가피하게 간병인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약간은 간병인의 눈치를 보고 기분을 맞춰 줘야만 하는 절박하고도 솔직한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신경외과 환자의 특성상 간병인의 역할은 실로 대단하다. 대소변을 다 받아 내는 경우는 허다하고 의식이 없는 환자는 체위 변경까지도 해야 한다. 물론 간호사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의료 현실상 의료진에게만 의지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환자의 덩치가 큰 경우에는 의료진 3~4명이 함께 힘을 합쳐야만 가능한 경우도 많다. 자식으로서 환자의 상태가 궁금할라치면 의료진보다 간병인에 전화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러한 경우에 간병인은 의료진의 말과 환자의 상태 등 둘 다 전화로 가족들에게 전달하고 설명해 줘야 한다. 만약 보호자가 느끼기에 전화 내용이 부족하거나 맘에 들지 않으면 위 경우와 같은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필자가 수련 기간이던 20여 년 전엔 환자 보호자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도맡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남편이 아프면 아내가, 부모가 아프면 자식이. 이런 가족 간의 사랑에 바탕을 둔 의무감으로 해왔던 일이였다. 하지만 가족 수가 줄고, 가족 간에 흩어져 살고, 고령화됨에 따라 가족 간의 보호자 역할은 줄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그 자리를 간병인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내가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대신 애써 주고 있는 사람은 매우 소중한 사람이다. 가족이 아닌 이상 하루 종일 환자와 함께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겠는가?
물론 거기에 대한 소정의 보상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홀대하거나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필자가 추측컨대 앞서 말한 환자 본인 또한 말은 못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너무나 씁쓸하고 마음이 아팠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가 아프든, 가족이 아프든 간에 우리가 죽기 전까지 병원 생활을 한 번도 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과 마음에 상처받은 환자를 위해 애써주는 사람이 가족 중의 한 명이건, 간병인이건 간에 그 역할 자체가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하기에 존경받아야 한다. 필자는 전공의들에게 늘 이런 말을 남기곤 한다. 간병인도 또 하나의 가족이기에 진심 어린 말투와 애정으로 보살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