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광주시장과 전남대병원] 시장과 병원, 생로병사의 골목을 누구나 서성거리네
오월의 붉은 핏빛…삶과 죽음의 틈새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서
절망 그리고 희망 보여
전남대병원 건너 남광주시장
새벽 시장 열리면 뒤이어 아침도 열려
생선골목부터 푸른길 공원까지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서
절망 그리고 희망 보여
전남대병원 건너 남광주시장
새벽 시장 열리면 뒤이어 아침도 열려
생선골목부터 푸른길 공원까지
![]() 김지연 작 ‘남광주 시장 풍경’ |
어머니에 대한 오래된 기억은 대부분 병원이다. 어머닌 생살을 찢는 대수술을 세번씩이나 하고도 팔순에 돌아가셨으니 복중의 복이라는 장수복이 그래도 있으셨던 분. 부모님을 여읜 지가 20년이 되어간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곳은 전남대병원 응급실. 평소 아프셨지만 응급실에서 그리 되실 줄은 정녕 몰랐지. 내 집안은 목사, 의사, 간호사, 교사 등의 직업군, 그 중에 시골 목사였던 아버지가 가장 가난한 행색이었다. 막내 이모부는 병원장 의사, 막내 이모는 어찌나 예쁘게 차려입고 다니시는지 우리 어머니와 나란히 있으면 마치 하녀처럼 슬퍼 보였다.
한번은 내가 아파 이모부 병원(입원실을 갖춘 제법 큰 종합병원)에 입원했는데, 외사촌들이 나는 한번도 구경한 일조차 없던 꿈의 과일 바나나를 줄기째 들고와설랑 하나 뚝 떼어주는 애정. 감격하여 다 먹지 않고 다음 날까지 아껴먹었다. 바나나 때문일까 아니면 이모부 실력 덕분일까 일주일쯤 뒤에 퇴원을 했는데, 바나나가 또 얻어먹고 싶어 재차 입원했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품기도 했었다.
작은 누나는 간호사였다. 전남대병원에서도 실습을 마치고 적십자병원에 들어가 5·18을 겪었는데, 엄청 쇼크를 입고 고생했단 얘길 들었다. 아버지가 딸들 걱정에 어렵사리 광주로 찾아간 일. 아버지가 목격한 병원의 넘치는 총상 환자들과 광주 천변의 시신들. 훗날 또 간호사 누나에게 들은 광주항쟁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 그야말로 ‘야전병원’에서 수고하며 환자들을 돌봤던 의사와 간호사 얘긴 두고두고 가슴앓이가 될만한 스토리였다.
그해 오월, 진압군의 도륙에 의해 전남대병원을 찾은 중상 이상의 환자가 1백 50명, 경상자까지 포함하면 3백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병원장이었던 고 조영국 선생의 기고 글에 의하면 “21일 오후 6시경, 군인들은 학동쪽으로 퇴각하면서 병원에 총을 갈기고 갔다. 내 방에도 한발이 날아와 박혔다. 그 순간 나는 직원 4명과 함께 원장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응급실과 복도, 중환자실 어디에도 환자는 눕혀 있었고 직원들도 아무 데고 누워 자곤 했다.”
또 정형외과 의사였던 노성만 선생은 “잠깐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바라본 응급실은 전시 체제의 야전병원이었다. 치열하게 삶과 죽음의 틈새에서 오늘을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서 절망 그리고 희망을 보았다.” 직원들은 피신한 젊은이를 환자복을 입혀 숨겨주기도 하고, 도망치던 이를 돕기도 했단다. 얼굴에 총상을 입어 턱만 뎅그러니 남아 있고, 몸에 총을 맞아 뻥 뚫린 시신을 목격하기까지 했다. 한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죽어도 너무 많이 죽었다.”
간호과장이었던 김안자 선생의 회고담도 찡한 내용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아이들은 당신이 지켜 내가 퇴근을 못하니까....” 나는 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6·25때 민간인 99만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때 광주시민이 약 70만명이었다, 그러다보니 군부정권이 잘못 판단하면 광주에 폭격을 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해 오월은 그렇게 붉은 핏빛으로 지나가고, 가수 정태춘의 노랫말처럼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붉은 꽃을 보면 환장할 가슴들을 떠올리게 된다. 전남대병원의 횡단보도 건너편엔 아직도 5·18 낙지집이 있는데, 낙지 비빔밥 같은 걸 파는 식당 이름에 무슨 까닭인지 5·18이 붙어있다. 한번은 서울 친구랑 그곳엘 부러 찾아갔는데, 대여섯 걸음 걷더니 “밥숟가락 뜨다가 왈칵 울 것 같은 그런 상호네 글쎄” 하더라. 피아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우리는 낙지 비빔밥을 조용히 먹었다.
그리고 남광주역. 화가 한희원 형과 의형제 삼아 지내는 통에 두어 번 곽재구 시인을 뵙게 되었다. 시인은 매우 조용조용하고, 톱밥 난로가 타오르듯 이야기를 꺼내곤 했던 기억. 실제가 아닌 가상의 역 사평역은 시인이 여러번 밝혔듯이 남광주역을 모델로 삼았단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완행열차 ‘비둘기호’가 정차하는 남광주역의 풍경을 농밀하게 그린, 절창이라 할만한 시다. 광주와 여수를 잇는 이 철로는 1930년 12월 25일 성탄절 눈이 펑펑 내리는 날 처음 개통되었다. 그러니까 루돌프 사슴이 끌 것 같은 성탄 열차. 겨울의 풍경을 간직하며 달리던 열차는 1938년 신광주역에서 남광주역으로 개명하고, 70여년 동안 사랑을 받다가 2000년 11월 14일 철마는 멈추고 역은 문을 닫게 되었다. 여수와 순천, 벌교를 비롯하여 서쪽 끝 목포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한 싱싱한 수산물이 남광주역을 가득 출렁이게 했던 사연. 목포 낙지나 벌교 꼬막을 사려면 시민들은 남광주역으로 일찍 찾아갔다.
광주사람이라면 남광주역 골목에 횟집 하나쯤 단골로 두어야 맞다. 나도 횟집 한군데를 가끔 찾아간다. 전에 메이홀 근처에서 다른 요식업을 할 때 우리 식구들 모여 놀던 가게를 하신 사장님이 남광주에 횟집을 차렸다. 내가 떴다하면 서비스는 기본. 무조림이 밑반찬으로 나오는데, 그게 먼저 맛나다. 연포탕이 시원하고 회도 굵게 썰어 내놓는다. 언젠가 누굴 뵈러 25시 레코드에 가서 내 편집 음반을 몇 장 사들고, 걸어서 그곳 ‘거북이식당’까지 갔는데, 충장로에서 남광주시장까지 의외로 가까움. “방도 없고 너무 훤하네요. 조용한데로 갈까요?” 친구가 첨엔 그랬다가 ‘사평역에서’ 시 이야기를 듣고는 그곳에 앉은 시민들이 달리 보인다고 했다. 둘이 얼큰하게 취해 구시청 ‘포플레이’까지 걸었던 기억.
남광주에선 흔한 일. 엉망으로 취한 취객이 전봇대를 붙잡고서 빙빙 돌고 있기도... 그가 중얼거리며 내뱉는 말. “오매 이것이 뭔 일이란 말이요. 완전히 벽에 갇혀 버렸당께요.” 웃으라고 하는 얘기를 심각하게 받지 말 것! 찬바람이 나면 취객들도 얼어 죽을까 무서워 남광주시장 깊숙이 돼지국밥집으로 숨고 안 보인다. 난전엔 매생이가 보일 때 쯤 나는 그곳에 ‘마침내’ 출몰하는 시기. 매생이를 사서 끓이려면 전문가(?)에게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매생이국을 먹으려면 뜨겁게 끓여선 안됨. 또 데워서 먹을 수도 없는 것이 흐물흐물 분해돼버림. 이게 끓었는지 아닌지 감이 오지 않을 때, 바로 그 때 곧바로 불을 꺼야 한다. 매생이국에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지는데, 보통 미운 사위에게 장모가 뜨거운 매생이국을 맛보라며 내민단다. 겉은 안 뜨겁게 보알 뿐 속아서 삼켰다간 큰일이 난다. 아무튼 사발과 대접, 보시기와 고봉밥이 나란한 식탁에서 매생이국 한 접시면 임금님 수라상, 진수성찬이 안부럽다.
가끔 김용휴의 시 ‘남광주역에 나는 가리’를 가수 주하주 샘이 작곡한 노랠 듣곤 해. 쿠바의 가수 아브라힘 페레를 닮은 주하주 샘과는 요새 무슨 일을 같이 도모하곤 그러는데, 구수한 목청으로 듣는 노래는 남광주의 독특한 냄새를 전달한다. “남광주 역에 나는 가리. 설레임으로 여기 서 있다. 아쉬움으로 여기 서 있다. 기적소리 없는 새벽 누가 열꼬. 비껴가는 허공의 구름일지라도, 스치는 바람이라도, 기적의 여운이라도,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회상시켜 볼 수 있다면, 광주의 새벽을 여는, 삶의 질곡을 푸는, 시골 할매들의 먼 숨결소리라도 들으러...”
병원에서 시장통까지 삶의 생로병사가 흐르는 이 골목길. 새벽 반짝 시장이 열리면 뒤이어 천천히 시장 구석구석 아침이 열린다. 국밥 반찬골목과 여인숙 골목, 꼬까옷 주단골목, 바다향 젓갈골목, 생선골목, 약초 건강골목, 과일 난전, 그리고 푸른길 기차 푸른길 공원, 광주천 지나 양림동까지 얼었던 흙이 녹듯 해토머리 온가득 햇살이 든다. 허리춤을 자끈동 묶고 삶을 다잡이 하면서 덤벼드는 사람들. 병원에도 유리창마다 아침 공기를 들이키는 의식처럼 창문을 연다. 가을 기운을 담뿍담은 강쇠바람이 들이치면 마마자국이 난 아지매가 오들 떨면서 문을 다시 닫아건다. 모두가 한눈에 보이는, 가차운(가까운) 거리의 이야기들이다.
든부자난거지(부자이면서 가난뱅이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도 남광주시장 옷가게에서 옷을 사면 딱 좋아. 과하지 않고 적당한 멋부림, 딱 좋아. 시골 어르신들이 남광주역에 오시면 꼬까옷을 늘 사던 곳. “느그들 묵고 사니라고 겁나 애썼지야. 어서어서 오니라이.” 명절에 서울에서 손주들 오면 알사탕에서부터 생선까지 모두 요 시장에서 샀지. 그러다가 늙고 병들어 전남대 병원을 들락거리면, 펄펄 살아 숨쉬는 시장에서 슬슬 죽어 스러지는 병원까지가 그렇게 가까운 거리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의진
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
그해 오월, 진압군의 도륙에 의해 전남대병원을 찾은 중상 이상의 환자가 1백 50명, 경상자까지 포함하면 3백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병원장이었던 고 조영국 선생의 기고 글에 의하면 “21일 오후 6시경, 군인들은 학동쪽으로 퇴각하면서 병원에 총을 갈기고 갔다. 내 방에도 한발이 날아와 박혔다. 그 순간 나는 직원 4명과 함께 원장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응급실과 복도, 중환자실 어디에도 환자는 눕혀 있었고 직원들도 아무 데고 누워 자곤 했다.”
![]()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남광주 시장 |
간호과장이었던 김안자 선생의 회고담도 찡한 내용이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아이들은 당신이 지켜 내가 퇴근을 못하니까....” 나는 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6·25때 민간인 99만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때 광주시민이 약 70만명이었다, 그러다보니 군부정권이 잘못 판단하면 광주에 폭격을 할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해 오월은 그렇게 붉은 핏빛으로 지나가고, 가수 정태춘의 노랫말처럼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붉은 꽃을 보면 환장할 가슴들을 떠올리게 된다. 전남대병원의 횡단보도 건너편엔 아직도 5·18 낙지집이 있는데, 낙지 비빔밥 같은 걸 파는 식당 이름에 무슨 까닭인지 5·18이 붙어있다. 한번은 서울 친구랑 그곳엘 부러 찾아갔는데, 대여섯 걸음 걷더니 “밥숟가락 뜨다가 왈칵 울 것 같은 그런 상호네 글쎄” 하더라. 피아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우리는 낙지 비빔밥을 조용히 먹었다.
그리고 남광주역. 화가 한희원 형과 의형제 삼아 지내는 통에 두어 번 곽재구 시인을 뵙게 되었다. 시인은 매우 조용조용하고, 톱밥 난로가 타오르듯 이야기를 꺼내곤 했던 기억. 실제가 아닌 가상의 역 사평역은 시인이 여러번 밝혔듯이 남광주역을 모델로 삼았단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 임의진 작 ‘남광주역 기차’ |
광주사람이라면 남광주역 골목에 횟집 하나쯤 단골로 두어야 맞다. 나도 횟집 한군데를 가끔 찾아간다. 전에 메이홀 근처에서 다른 요식업을 할 때 우리 식구들 모여 놀던 가게를 하신 사장님이 남광주에 횟집을 차렸다. 내가 떴다하면 서비스는 기본. 무조림이 밑반찬으로 나오는데, 그게 먼저 맛나다. 연포탕이 시원하고 회도 굵게 썰어 내놓는다. 언젠가 누굴 뵈러 25시 레코드에 가서 내 편집 음반을 몇 장 사들고, 걸어서 그곳 ‘거북이식당’까지 갔는데, 충장로에서 남광주시장까지 의외로 가까움. “방도 없고 너무 훤하네요. 조용한데로 갈까요?” 친구가 첨엔 그랬다가 ‘사평역에서’ 시 이야기를 듣고는 그곳에 앉은 시민들이 달리 보인다고 했다. 둘이 얼큰하게 취해 구시청 ‘포플레이’까지 걸었던 기억.
남광주에선 흔한 일. 엉망으로 취한 취객이 전봇대를 붙잡고서 빙빙 돌고 있기도... 그가 중얼거리며 내뱉는 말. “오매 이것이 뭔 일이란 말이요. 완전히 벽에 갇혀 버렸당께요.” 웃으라고 하는 얘기를 심각하게 받지 말 것! 찬바람이 나면 취객들도 얼어 죽을까 무서워 남광주시장 깊숙이 돼지국밥집으로 숨고 안 보인다. 난전엔 매생이가 보일 때 쯤 나는 그곳에 ‘마침내’ 출몰하는 시기. 매생이를 사서 끓이려면 전문가(?)에게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매생이국을 먹으려면 뜨겁게 끓여선 안됨. 또 데워서 먹을 수도 없는 것이 흐물흐물 분해돼버림. 이게 끓었는지 아닌지 감이 오지 않을 때, 바로 그 때 곧바로 불을 꺼야 한다. 매생이국에 입천장이 홀라당 벗겨지는데, 보통 미운 사위에게 장모가 뜨거운 매생이국을 맛보라며 내민단다. 겉은 안 뜨겁게 보알 뿐 속아서 삼켰다간 큰일이 난다. 아무튼 사발과 대접, 보시기와 고봉밥이 나란한 식탁에서 매생이국 한 접시면 임금님 수라상, 진수성찬이 안부럽다.
![]() 임의진 작 ‘남광주역 기차’ |
병원에서 시장통까지 삶의 생로병사가 흐르는 이 골목길. 새벽 반짝 시장이 열리면 뒤이어 천천히 시장 구석구석 아침이 열린다. 국밥 반찬골목과 여인숙 골목, 꼬까옷 주단골목, 바다향 젓갈골목, 생선골목, 약초 건강골목, 과일 난전, 그리고 푸른길 기차 푸른길 공원, 광주천 지나 양림동까지 얼었던 흙이 녹듯 해토머리 온가득 햇살이 든다. 허리춤을 자끈동 묶고 삶을 다잡이 하면서 덤벼드는 사람들. 병원에도 유리창마다 아침 공기를 들이키는 의식처럼 창문을 연다. 가을 기운을 담뿍담은 강쇠바람이 들이치면 마마자국이 난 아지매가 오들 떨면서 문을 다시 닫아건다. 모두가 한눈에 보이는, 가차운(가까운) 거리의 이야기들이다.
든부자난거지(부자이면서 가난뱅이처럼 하고 다니는 사람)도 남광주시장 옷가게에서 옷을 사면 딱 좋아. 과하지 않고 적당한 멋부림, 딱 좋아. 시골 어르신들이 남광주역에 오시면 꼬까옷을 늘 사던 곳. “느그들 묵고 사니라고 겁나 애썼지야. 어서어서 오니라이.” 명절에 서울에서 손주들 오면 알사탕에서부터 생선까지 모두 요 시장에서 샀지. 그러다가 늙고 병들어 전남대 병원을 들락거리면, 펄펄 살아 숨쉬는 시장에서 슬슬 죽어 스러지는 병원까지가 그렇게 가까운 거리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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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화가. 사진도 찍는다. ‘참꽃 피는 마을’, ‘버드나무와 별과 구름의 마을’, ‘여행자의 노래 1-10’, ‘심야버스’ 등의 수필집, 시집, 음반 등을 펴냈으며 EBS 세계테마기행,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등에 종종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