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③
이순신 장군 후군장 최대성, 옥포·합포·적진포 해전 활약
최시망, 나주서 의병 모집
왜적 쫓아 경남 함양으로 진군
왕득인·이정익·오종 등 7의사
격전지 구례 석주관에 위패 모셔
퇴은당 염걸, 강진 관문 구십포서
화살 퍼부어 왜적 함선 전멸
최시망, 나주서 의병 모집
왜적 쫓아 경남 함양으로 진군
왕득인·이정익·오종 등 7의사
격전지 구례 석주관에 위패 모셔
퇴은당 염걸, 강진 관문 구십포서
화살 퍼부어 왜적 함선 전멸
![]()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구례군 토지면 석주관. 왕득인을 비롯해 그의 아들 왕의성, 친구 사이인 이정익, 오종, 고정철, 양응록, 한호성 등 7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석주관 전투에는 화엄사 스님 153명도 참가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건축물 안에 후대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콘텐츠가 없다는 점이다. |
의병장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적이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양반, 농민 등을 이끌며, 신무기 조총을 지닌 정규군 왜적과 맞섰다. 남도 의병은 충남 금산성, 수원 독산성, 경남 진주성 등 타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물러섬없이 처절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점에서 그 구국충절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명시된 의병장들의 전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괴정 최시망
1592년 4월 임란 발발 당시 김제군수였던 최시망은 근왕을 위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6월 8일 도착한 그는 조정 대신들과 함께 영변, 박천, 의주까지 동행했다. 요동으로 건너가려던 선조를 윤두수, 류성룡, 윤근수 등이 불가하다며 막아서는 등 조정 내부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 때 7월 10일 고경명, 8월 18일 조헌이 각각 금산성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선조에게 남하를 보고한 뒤 10월 나주에 내려와 의병을 모집했다. 홍민성·민언은 스승 조헌에게 합류하려다 장성 갈재에서 전사소식을 듣고 합류했으며, 모두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1593년 3월 진주성 위급 소식을 듣고 남원을 거쳐 남하하던 시망의 의병들은 여원치에서 만난 왜적 208명을 사살하고, 도망가는 왜적을 쫓아 3월 26일 경남 함양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매복해 있던 왜적의 반격을 받은 시망은 허벅지에 조총을 맞아 낙마한 뒤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전장을 벗어났다. 함양 부근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도중 진주성에서 구원 요청이 이어지자 종질 최희립에게 군사를 건네고 나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왕득인 등 7의사
왕득인은 임란이 발발하자 우선 군량미를 모아 고경명, 김천일에 전달했다. 하지만 1593년 6월 진주성을 함락한 왜적이 경남 하동을 지나 전라도로 침입하려하자 곽영 장군을 도와 왜적의 길목인 구례 석주관을 막기로 하고 5~6차례 왜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이순신이 8월 3일 구례현감 이원춘을 찾아와 구례와 석주관의 사수를 요청했다.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석주관으로 왜적이 몰려들자 이원춘은 1,000여 명의 관군을 독려하며 항전했으나 패퇴하고 300여 명과 함께 남원으로 이동했으나 장렬히 전사했다. 이에 왕득인은 왜적 병참로의 핵심인 구례를 지키기 위해 거병하고, 아들 의성과 가족들을 지리산으로 피신시켰다. 4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석주관에 도착한 득인은 우선 남원 숙성치의 유격장 조경남을 찾아가 전술을 배웠다.
탄약과 군량미 보급을 위해 왜적들이 다가서자 통나무와 바위로 외길을 막고 섬진강에서 물을 마시며 쉬는 왜적에게 바위와 화살로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100여 석의 군량을 압수하고 탄약을 불태워버렸다. 병참로가 막히면서 공주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던 왜적은 석주관 침공에 나섰다. 득인은 집 머슴인 삼수(당시 19세)를 중심으로 30명의 유격대를 편성해 선봉에 서도록 했으나 왜적들이 석주관 턱밑까지 진격해오자 총공격 백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조총을 가진 2,000여 명의 왜적에 역부족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득인은 북향재배한 뒤 왜적에게 뛰어들었으며, 조총에 가슴을 맞아 말에서 떨어져 숨졌다. 24세의 왕의성은 아버지 전사 소식을 듣고 석주관을 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복수를 맹세했다.
의성은 ‘복수’라는 글을 쓴 깃발을 들고 석주관 사수에 나섰으며, 구례 출신 이정익, 오종, 고정철, 양응록, 한호성 등이 석주관에서 죽을 것을 맹세하며 합류했다. 이정익 등 5명은 “나라가 위태로움에 나서지 않음은 불충이다. 우리 다섯 동지는 죽음으로써 왜놈들과 싸울 것을 맹세한다”는 혈서를 쓰며 각오를 다졌다. 6명의 의사는 1,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군막을 설치하고, 4km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에게 정탐꾼을 보낸 뒤 지형을 이용해 왜적을 막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 화엄사에 사람을 보내 양식을 요청하자 스님 153명이 쌀 103석과 함께 석주관을 찾았다. 1597년 12월 석주관 바로 밑까지 진격한 왜적에 대응해 산등성이에 매복해 있던 양응록·한호성 부대가 후미 공격을 맡고, 이정익 부대가 석주관 위에서 바위를 굴리고, 왕의성이 성문을 열고 백병전에 나서는 등 총공격에 왜적은 수 백명의 시신을 남기고 후퇴했다.
이후 1598년 봄 다시 1만여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선 왜적이 경남 하동을 지나 화개에 이르자 6의사는 긴급전략회의를 가졌다. 회의 결과 한호성이 기마병 30여 기로 왜적을 끌어들이고, 오종이 100여명을 이끌고 골짜기 중간에서 지원하며, 200여명을 거느린 이정익이 퇴로를 차단하고, 양응록은 300여명과 같이 오른쪽 산등성이에 매복해 공격하기로 했다. 또 고정철이 승병과 의병을 거느라고 왼쪽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왕의성은 산꼭대기 주둔해 바위를 굴려 왜적을 공격하는 계획을 짰다. 야음을 틈탄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고 왜적 선봉대를 대파한 의병은 다음날 몰려든 본진과 맞섰다. 하지만 밤새도록 싸운 의병은 이미 지쳐 있었고, 조총을 쏘며 조직적으로 성벽을 오르는 왜적과 백병전에 나섰으나 왕의성을 제외한 5의사 모두 조총에 한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골짜기에 그 때 흘린 의병들의 피가 넘치면서 이름이 피내골로 바뀌었다. 왕의성은 조총에 맞아 기절했다가 며칠 뒤 깨어나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의 한일합병 당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은 7의사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다.
모의장 최대성
최대성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후군장이었다. 1592년 5월 7일 옥포와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해전 등에 큰아들 언립, 셋째 아들 후립 등과 함께 참전했다. 옥포해전에서 왜적의 50여척 함선과 싸워 26척, 합포해전에서는 5척, 적진포에서는 11척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산, 안골포, 당포, 부산포, 웅포 등의 해전에도 참가해 분투했다. 아버지 최한손의 위독 소식을 듣고 9월 1일 부산포 전투를 마지막으로 귀향한 대성은 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삼년상을 치렀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2,000여 명의 의병을 훈련시켜 순천, 낙안을 거쳐 광양 방면으로 진군했다.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해당하는 광양, 순천, 보성, 낙안 등지에 병력을 매복시키며 유격전을 폈다. 보성군 득령면 죽전의 성적골에서 왜적 30여 명을 사살한 뒤 고흥 연안 망저포에 침입한 왜적 20여 명을 잡아죽였다. 이후에도 100여 명의 왜적의 목을 벤 그는 1598년 4월에도 벌교포, 목포, 장암포, 영등포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1598년 6월에는 보성 예진에 왜적 함선 10여 척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회의 보고를 받자 산길을 달려 도착하자 이미 왜적이 진을 치고 대성을 공격했다. 오돈치로 후퇴하던중 1598년 6월 8일 45세 나이로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퇴은당 염걸
염걸은 1592년 9월 강진 칠량과 마량을 잇는 관문인 구십포에 수십척 왜적 함선이 나타나자 300여 장병을 모아 거병했다. 왜적이 산등성이를 오르자 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켰고, 이후 함선에 경고하는 편지를 30근짜리 화살촉에 묶어 쏴 왜적을 놀라게 했다. 이후 구십포에서 40리(15.7km) 떨어진 수정사에 주둔한 뒤 계곡을 통과하는 1,000여 명의 왜적에게 화살을 쏘며 백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힌 14세의 막내 동생 염경은 왜적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왜적들에게 염걸과 그 형제인 염서, 염홍립 등은 호랑이처럼 무섭다고 해 삼호(三虎)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뒤 우수영에 머물면서 염걸의 이야기를 듣고 의병장 칭호를 내리고, 육지의 잔적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이에 염걸은 아우들이 말리는데도 장흥 회령진의 대규모 왜적을 기습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염걸을 찾아 치하했으며, 염걸은 해남으로 나아가 송여종, 송희립 등과 함께 싸워 4~5명을 포로로 잡아 이순신에게 넘겼다. 그날 밤 이순신의 꿈에 왜적에 붙잡혀 전사한 아들 면이 나타나 원수를 갚아줄 것을 간청하자 이순신이 염걸이 넘긴 포로들에게 대해 조사한 결과 면을 죽인 왜적이 숨어있었다.
염걸이 광양 왜교전투에서도 맹활약하자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에게 공훈을 알렸다. 이에 조정은 염걸, 염서, 염홍립에게 수문장이라는 벼슬을 제수했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과 작전회의 후 선봉장으로 최전방에 나선 염걸 등은 거제도까지 왜적을 추적하다 모두 숨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괴정 최시망
1592년 4월 임란 발발 당시 김제군수였던 최시망은 근왕을 위해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6월 8일 도착한 그는 조정 대신들과 함께 영변, 박천, 의주까지 동행했다. 요동으로 건너가려던 선조를 윤두수, 류성룡, 윤근수 등이 불가하다며 막아서는 등 조정 내부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 때 7월 10일 고경명, 8월 18일 조헌이 각각 금산성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선조에게 남하를 보고한 뒤 10월 나주에 내려와 의병을 모집했다. 홍민성·민언은 스승 조헌에게 합류하려다 장성 갈재에서 전사소식을 듣고 합류했으며, 모두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1593년 3월 진주성 위급 소식을 듣고 남원을 거쳐 남하하던 시망의 의병들은 여원치에서 만난 왜적 208명을 사살하고, 도망가는 왜적을 쫓아 3월 26일 경남 함양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매복해 있던 왜적의 반격을 받은 시망은 허벅지에 조총을 맞아 낙마한 뒤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전장을 벗어났다. 함양 부근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도중 진주성에서 구원 요청이 이어지자 종질 최희립에게 군사를 건네고 나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석주관 7의사의 전투 모습을 묘사한 부조. |
왕득인은 임란이 발발하자 우선 군량미를 모아 고경명, 김천일에 전달했다. 하지만 1593년 6월 진주성을 함락한 왜적이 경남 하동을 지나 전라도로 침입하려하자 곽영 장군을 도와 왜적의 길목인 구례 석주관을 막기로 하고 5~6차례 왜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이순신이 8월 3일 구례현감 이원춘을 찾아와 구례와 석주관의 사수를 요청했다. 남원으로 가는 길목인 석주관으로 왜적이 몰려들자 이원춘은 1,000여 명의 관군을 독려하며 항전했으나 패퇴하고 300여 명과 함께 남원으로 이동했으나 장렬히 전사했다. 이에 왕득인은 왜적 병참로의 핵심인 구례를 지키기 위해 거병하고, 아들 의성과 가족들을 지리산으로 피신시켰다. 4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석주관에 도착한 득인은 우선 남원 숙성치의 유격장 조경남을 찾아가 전술을 배웠다.
탄약과 군량미 보급을 위해 왜적들이 다가서자 통나무와 바위로 외길을 막고 섬진강에서 물을 마시며 쉬는 왜적에게 바위와 화살로 공격해 대승을 거뒀다.100여 석의 군량을 압수하고 탄약을 불태워버렸다. 병참로가 막히면서 공주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던 왜적은 석주관 침공에 나섰다. 득인은 집 머슴인 삼수(당시 19세)를 중심으로 30명의 유격대를 편성해 선봉에 서도록 했으나 왜적들이 석주관 턱밑까지 진격해오자 총공격 백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조총을 가진 2,000여 명의 왜적에 역부족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득인은 북향재배한 뒤 왜적에게 뛰어들었으며, 조총에 가슴을 맞아 말에서 떨어져 숨졌다. 24세의 왕의성은 아버지 전사 소식을 듣고 석주관을 갔으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복수를 맹세했다.
![]() 석주관 맞은편에 자리한 7의사의 비석. |
![]() 석주관 맞은편에 자리한 7의사의 묘소. 묘소가 8개인 이유는 남원성 전투에서 사망한 구례현감 이원춘도 함께 모셨기 때문이다. 묘소의 규모는 실제보다 작게 했다. |
모의장 최대성
최대성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후군장이었다. 1592년 5월 7일 옥포와 합포해전, 5월 8일 적진포해전 등에 큰아들 언립, 셋째 아들 후립 등과 함께 참전했다. 옥포해전에서 왜적의 50여척 함선과 싸워 26척, 합포해전에서는 5척, 적진포에서는 11척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산, 안골포, 당포, 부산포, 웅포 등의 해전에도 참가해 분투했다. 아버지 최한손의 위독 소식을 듣고 9월 1일 부산포 전투를 마지막으로 귀향한 대성은 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삼년상을 치렀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2,000여 명의 의병을 훈련시켜 순천, 낙안을 거쳐 광양 방면으로 진군했다.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해당하는 광양, 순천, 보성, 낙안 등지에 병력을 매복시키며 유격전을 폈다. 보성군 득령면 죽전의 성적골에서 왜적 30여 명을 사살한 뒤 고흥 연안 망저포에 침입한 왜적 20여 명을 잡아죽였다. 이후에도 100여 명의 왜적의 목을 벤 그는 1598년 4월에도 벌교포, 목포, 장암포, 영등포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1598년 6월에는 보성 예진에 왜적 함선 10여 척이 정박하고 있다는 정회의 보고를 받자 산길을 달려 도착하자 이미 왜적이 진을 치고 대성을 공격했다. 오돈치로 후퇴하던중 1598년 6월 8일 45세 나이로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퇴은당 염걸
염걸은 1592년 9월 강진 칠량과 마량을 잇는 관문인 구십포에 수십척 왜적 함선이 나타나자 300여 장병을 모아 거병했다. 왜적이 산등성이를 오르자 화살을 퍼부어 전멸시켰고, 이후 함선에 경고하는 편지를 30근짜리 화살촉에 묶어 쏴 왜적을 놀라게 했다. 이후 구십포에서 40리(15.7km) 떨어진 수정사에 주둔한 뒤 계곡을 통과하는 1,000여 명의 왜적에게 화살을 쏘며 백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힌 14세의 막내 동생 염경은 왜적에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왜적들에게 염걸과 그 형제인 염서, 염홍립 등은 호랑이처럼 무섭다고 해 삼호(三虎)장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뒤 우수영에 머물면서 염걸의 이야기를 듣고 의병장 칭호를 내리고, 육지의 잔적 무찌르라고 명령했다. 이에 염걸은 아우들이 말리는데도 장흥 회령진의 대규모 왜적을 기습공격해 대승을 거뒀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염걸을 찾아 치하했으며, 염걸은 해남으로 나아가 송여종, 송희립 등과 함께 싸워 4~5명을 포로로 잡아 이순신에게 넘겼다. 그날 밤 이순신의 꿈에 왜적에 붙잡혀 전사한 아들 면이 나타나 원수를 갚아줄 것을 간청하자 이순신이 염걸이 넘긴 포로들에게 대해 조사한 결과 면을 죽인 왜적이 숨어있었다.
염걸이 광양 왜교전투에서도 맹활약하자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에게 공훈을 알렸다. 이에 조정은 염걸, 염서, 염홍립에게 수문장이라는 벼슬을 제수했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과 작전회의 후 선봉장으로 최전방에 나선 염걸 등은 거제도까지 왜적을 추적하다 모두 숨졌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