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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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의병장들의 화려한 승전의 기록 ①
고경명, 금산전투서 아들과 순절
최경회, 장수 월강평에 부대 주둔
남원·전주 인근 출몰 왜적 소탕
강희보, 가장 먼저 진주성으로
구례 석주관 지키던 강희열도 합류
2021년 06월 11일(금) 03:00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호남 침입을 노리는 왜적과 이를 막으려는 남도의병들간의 최대 격전이었다. 김천일을 비롯해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고경명의 맏아들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 표의병부장 강희보, 분의장군 강희열, 복수의병장 오유, 양산숙, 조인호, 문홍헌, 오비, 김인흔, 거제현령 김현민, 적개의병장 이잠, 민여운 등이 수많은 호남인들이 목숨을 바쳤다. 사진은 진주성 서장대.
의병장들은 정규 훈련을 받은 적 없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양반, 농민 등을 이끌며, 신무기 조총을 지닌 정규군 왜적들과 맞섰다. 관군들이 피했던 전투에도 악착같이 나섰고, 유격전을 펼치며 왜적들의 끝까지 괴롭혔다. 특히 남도 의병은 충남 금산성, 수원 독산산성, 경남 진주성 등 타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물러섬없이 부딪혀 처절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점에서 그 구국충절에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광주일보 ‘의병열전(1975.12.1~1977.7.21)’에 명시된 의병장들의 승전 기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 충렬공 고경명

담양에서 출정한 고경명 의병은 영암, 해남, 강진 등에서 몰려온 양반, 농민들이 주축이 됐다. 전북 태인, 전주, 남원으로 북상하면서 병력이 7,000명으로 늘었다. 수원에 있던 광주목사 정윤우에게 군졸을 인계하려고 상경하던 종후와 인후가 왜적에 길이 막혀 내려오며 전주에서 아버지와 결합했는데, 경명은 큰아들 종후에게 격문을 줘 금구와 임파에서 병기와 식량을 모아오도록 지시했다. 전주에서 전국 각지의 읍에 위국진충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고, 1592년 6월 20일 조정에 보고한 뒤 북상을 계속했다. 서울로 향해가다 권율에게 패한 코바야가와(小早川隆景)가 충남 금산으로 쫓겨 오자 전략회의를 거쳐 호남 수호를 위해 금산전투를 결정했다. 7월 1일 인근 연산현에 진을 구축하고 중봉 조헌에게 편지를 보내 합동작전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헌은 참여하지 못했으며, 경명은 7월 9일 진산군으로 나아가 금산성 공격에 나섰다. 고경명 의병은 금산성을 포위한 뒤 7월 10일 새벽 야음을 틈타 복병을 배치하던 왜병 4~5명을 잡아 죽인 뒤 왜군 앞잡이 역할을 하던 백성 5~6명까지 붙잡았다. 10일 전투에서 왜적은 전의를 상실한 관군을 집중 공격했는데, 영암군수 김성헌과 방어사 광역이 도주하고 말았다. 이에 경명은 종사관 안영, 유팽로, 둘째 아들 인후 등과 함께 본진을 지키며 왜적과 백병전을 벌이다 순국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중봉 조헌은 전라감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의 참수를 읍소했다고 한다.



담양 추성관에 보관돼 있는 고경명 의병 진군도. 1592년 7월 10일 금산전투에서의 고경명 장군의 장렬한 전사는 남도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기폭제가 됐다.
◇ 문열공 김천일

김천일 의병은 광주, 담양, 순창, 임실을 지나자 2,000여 명, 서울을 향해 북진하자 5,000여 명의 대병으로 증가했다. 북진 도중 용인전투에서 대패한 뒤 귀향하는 관군들을 만나면서 의병들도 술렁였다. 용인전투에서는 5만명 관군이 1,600여명에 불과한 와키자카 야스하루(脅坂安治)군에게 대패했었다. 천일은 추상같은 영을 내려 분위기를 일신하고, 충남 강경에서 왜적 500여명과 첫 전투에 나서 양산숙이 15명의 수급을 벴다. 이후 종사관 서정후의 반대에도 금강을 건너 경기도로 진군했으며, 용인 금령 역말이라는 곳에서 왜적과 20여리 거리에서 대치했다. 백제의 옛 성터인 수원 독산산성에 진을 구축한 뒤 용의주도한 전략과 매복 작전으로 용인전투에서의 관군 패배를 설욕했다. 왜적이 도주하자 수원에 입성했으며, 선조는 천일을 창의사로 임명했다.

천일의 연전연승에 의병 지원자가 증가하자 경기감사 권징은 관군 모집이 안 된다는 이유로 의병 모집을 금지하는 등 관군과 의병 간 전공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천일은 강화도로 진지를 옮겨 의주행재소와 호남, 호서 간 통로 역할을 자임했다. 광해군이 천일에게 첨지중추부사 겸 방어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한양에 의병을 잠입시켜 왕릉을 보호하기도 했으며, 1593년 1월 명군이 왜적과 강화에 나서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후 400여 척을 끌고 김포와 양화진으로 진격, 경기수사 이빈과 서울 공략에 나서 왜적 수천을 주살해 명나라 장군 이여송도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왜적과의 협상을 위해 의병을 억제하는 이여송은 부하 장수인 심주를 보내 천일을 설득하지만 천일은 한양에서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경기수사 이빈, 충청수사 정걸 등과 함께 군량미를 보관중인 용산창을 태워버렸다. 1593년 4월 18일 왜적이 철수하자 천일은 서울에 최초로 입성했으나, 왜적을 뒤쫓으려 했으나 이여송이 제동을 걸었다. 유성룡이 이여송을 설득한 뒤에야 왜적 추적에 나선 천일은 호남의 관문인 진주성으로 향했다.

명군, 관군, 심지어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까지도 철수해버린 진주성으로 진격한 그를 맞이한 이는 남도 의병들이었다.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사천현감 장윤, 고경명의 맏아들 고종후, 김해부사 이종인, 표의병부장 강희보, 분의장군 강희열, 복수의병장 오유, 양산숙, 조인호, 문홍헌, 오비, 김인흔, 거제현령 김현민, 적개의병장 이잠, 민여운 등이 천일과 뜻을 같이했다. 1593년 6월 19일 3, 4겹으로 둘러싼 왜적 15만여 명의 공격이 시작되자 7번을 맞서 6번을 격퇴했지만, 11일만인 6월 29일 동문이 무너지면서 진주성은 함락됐다.



◇ 충의공 최경회

최경회는 거병한 뒤 자신이 군수로 지낸 전북 장수로 진격해 우선 무주, 지안, 용담, 남원, 임실 등에 격문을 돌렸다. 이후 임내면 월강평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남원, 전주 등 인근에 출몰한 왜적을 소탕했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권율이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적 방어를 명령하자 전북 무주의 적상산성으로 진을 옮겼다. 진안에서 거병한 함양 출신 부장 오비가 1,000여명의 의병 이끌고 합류하자 고경명과 조헌의 복수를 위해 금산성 공격에 나섰다. 1952년 8월 20일 밤 작전회의를 거쳐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와 어둠을 이용해 야습을 감행했다. 병사들에게 짚다발을 안고 진격하지 말 것을 지시해 왜적의 총탄과 활을 낭비하게 했다. 적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 금산성을 나간 왜적이 전라도를 넘보며 전주로 향하자 복병을 숨겨두고 맞았다. 백마를 탄 왜적을 직접 활로 쏴 죽였으며, 그 왜장의 가슴 갑옷 안에서 고려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와 12척 언월도도 함께 수거했다. 칼에는 모리미찌(盛道)라는 대장장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칼은 경회의 후손인 1975년 당시 최유상씨가 나무 손잡이가 사라진 녹슨 상태로 보관중이었다.

적상산성으로 돌아온 뒤 경회의 소문이 나면서 의병들이 몰려들어 병력은 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1592년 9월 중순 가또 미쓰야스(加藤光泰) 등 10명의 왜적 장수와 2만의 군대가 김해성을 나와 10월 3일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키는 진주성을 포위했다. 경상우순찰사의 요청을 받은 경회는 정병 5,000명을 선발해 진주로 출발했으며, 삼도 임계영의 2,000여 명 의병과 합세했다. 곽재우도 진주성 북쪽 비봉산에 진을 치고, 의병장 최강, 이달, 고성현령 조응도 등이 남강을 건너 왜적을 위협했다. 정유경, 정기룡, 조경정 등도 적을 유인하거나 견제했다. 10월 5일부터 전투가 시작됐으나 진주목사 김시민의 통솔력 있는 지휘와 외곽 의병장들의 지원 속에 5일만에 왜적을 패주시켰다.

이후 경상도 의병장 김면으로부터 성주성을 공격하자는 편지를 받고 이동했다. 왜장 가쓰라 모토쓰나(桂元網)가 지키고 있었는데, 김면은 8·9월 두 차례 공격에도 함락하지 못했다. 최경회, 임계영 등이 합세해 12월 7일 추위 속에 제3차 공격에 나서 7일간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이듬해인 1593년 1월 15일 밤 왜적은 성에서 도주했으며, 1593년 3월 경상우병사 김면이 진중에서 사망하자 조정으로부터 그 직을 물려받았다. 경회는 이후 왜적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1593년 6월 15일부터 함안, 반성, 선녕 등을 점령하고, 김천일의 진주성 사수 제안에 “진주는 호남에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동의했다. 그의 후처인 논개도 뒤늦게 진주성에 입성해 합류했다.



◇ 형제의병장 강희보·강희열

강희보는 임란이 발발하자 우선 백부 강인상을 찾아가 거병을 상의했다. 백부 강인상은 그 세 아들 희원, 희중, 희복 등과 이미 거병한 상태였다. 희보의 인품에 운집한 100여 명, 백부 등이 거느린 1,400여 명 등 1,500여 명은 희열이 지키고 있는 경남 산청의 단성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단성은 이미 5,000여 명의 고바야시(小早川降景) 왜적이 포위하고 있었다. 희보의 부장인 임우화가 야음을 틈타 기습공격을 감행, 50대1의 싸움에 나서고 성안에서도 호응해 왜적을 거창으로 패퇴시켰다. 곽재우가 단성으로 찾아와 칭찬할 정도로 대승이었다.

당시 곽재우는 경남 의령에서 왜적과 대치중에 있었으며, 거창 의병장 김면과 금산의병장 여대로, 권응성 등이 경남 지례, 금산의 길을 막았고, 정인홍은 경북 성주에서 고령과 합천의 길을 막고 있었다. 고바야시군이 경북 개령과 금산 방면으로 계속 침략하자 경상초유사 김성일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거창, 함양, 산청, 합천 등의 지방에 흩어져 있던 군사 3000여 명을 의병장 송암 김면(부사 김세문의 아들)의 밑으로 귀속시켰다. 이 때 강인상은 곽재우에게, 강희보는 김면에 각각 합류했다. 김면과 강희보는 1,000여 명 이끌고 합류하는 김시민과 함께 거창 사랑암 앞에서 왜적과 조우해 승리하며, 영남과 호남의 안전을 확보했다. 이 때 김면은 희보를 표의병부장에 임명했으며, 김면은 희보와 함께 큰 전투 10여 차례를 포함해 30여 차례나 승리한 명장이었다. 하지만 김면은 1593년 3월 11일 진중에서 병을 얻어 숨졌다.

1593년 4월 왜적이 서울에서 철수를 시작한 뒤 6월 들어 진주성의 진입을 두고 관군, 의병 간 논쟁이 일자 김면 사후 그 의병을 이끌던 강희보가 가장 먼저 진주성으로 향하고, 곽재우의 밑에 있던 백부 강인상은 아들 희복·희원을 진주성으로 보냈다. 당시 구례 석주관을 지키고 있던 강희열도 6월 18일 진주성에 도착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는 강씨 형제 4명이 모두 참여했다.

/윤현석 기자 chadol@kwangju.co.kr

/사진=김진수 기자 jeans@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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