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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2020년 07월 10일(금) 00:00
황성호 신부·광주가톨릭사회복지회 부국장
편견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명확하게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들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오류투성이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편견으로 인해 사람을 미워했던 적이 있다. 사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미사 중 강론하고 있을 때 계속 눈에 들어오는 신자 한 분이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항상 찡그린 얼굴이었다. 강론의 내용이 깊이가 있어도, 재미있거나 슬퍼도 항상 찡그린 그 얼굴 그대로였다. 미사를 봉헌할 때, 복음 선포 후 강론을 할 때,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심히 그 신자를 지켜보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똑같았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사무실 직원에게 그 신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 신자로 인해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개인적으로 사무장에게 말했다. 그런데 사무장으로부터 그 신자의 과거 사연을 듣는 순간, 나는 나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에 미안함과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왜냐하면 그 신자는 10여 년 전, 큰 사고를 당해 얼굴까지 심하게 다쳤다고 한다. 그는 수술과 오랜 재활을 통해 다시 원래의 삶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웃어도 얼굴은 찡그린 얼굴이고, 슬퍼도 찡그린 얼굴이라고 했다.

어느 날 나는 그 신자를 만났을 때, 내가 그렇게 바라봤노라고 말하면서 미안하고 죄송하다고 했다. 내 안의 편견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인지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스페인어로 편견은 ‘Prejuicio’라고 한다. 선입관, 예견, 억측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국어사전에서도 편견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라고 설명한다. 완전하지 못한 이해와 앎이라고 할까, 반쪽짜리 판단, 절반의 이해와 앎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편견은 인간관계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우리가 갖지 않아도 되는 하나의 견해인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 어떤 판단 등의 시작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감각에 의해서 정립되고 만들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서 많은 것을 느끼고, 그 느낌은 내적 지적 활동을 통해 정리된다. 그런데 우리는 정리된 그것이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정리된 대부분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인지 모르겠다. 노숙인에 대해 “저렇게 몸이 성하면서 왜 일도 하지 않고 저리 사는지?”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벼랑 끝에 서 본 적이 있느냐? 사회 구조적인 악으로 인해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한번 처해 봤느냐?”라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미혼모를 향해 “나이도 어린 것이 못돼 먹어 가지고!”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면 편견의 시각으로 말하는 이들의 눈을 보며 “도망칠 수 없는 폭력에 억눌려 본 적이 있느냐? 상대의 폭력에 가슴이 찢어져 본 적이 있느냐?”라고 질문해 보기도 한다. 정말 게을러서일까? 정말 못돼 먹어서일까? 혹시 편견으로 자기보다 못한 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저러지 않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감히 질문을 던져 본다.

결국 편견의 시작은 우월함이고, 편견의 결말은 폭력이다. 우월함은 감각에 의해서 형성된다. 감각은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감각은 지금보다 더 나은, 더 편안한 것을 원한다. 감각은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에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다. 감각은 익숙함을 좋아하고 불편함을 거부하기에 우리를 탐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가톨릭 신앙에서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영성을 통한 영적인 식별이다. 예수의 사랑과 희생과 죽음이 그 영적인 식별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뽑으셨다. 예수는 제자들을, 또 당신이 만났던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든 간에 당신 자신 전체를 내어 주셨다. 이것이 편견을 없애는 답이 아닐까?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이 시기, 편견을 치우고 우리 함께 이겨내 보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장 34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