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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와 자연화
2020년 05월 15일(금) 00:00
황성호 신부·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문명화’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궁금하다. 문명의 사전적 의미는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이다. 그리고 문명화에 대해서는 ‘원시적 생활에서 벗어나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모습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이라 설명한다. 문명화라는 단어가 궁금했던 이유는 잘 발달된 아름다운 도시의 이면에 가려진 노숙자들을 만났을 때, 승패와 소유의 기준인 경쟁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엄한 인간성이 저평가되고 파괴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우리의 삶이 점점 더 풍요롭고 편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보다 노예와 같은 삶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모의고사를 볼 때였다. 영어 시험 시간이 되면 내 귀를 쫑긋 세우고 모든 정신을 집중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듣기 테스트였다. 문명화된 선진국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들의 문물을 배우고 받아들여야만 그 시대를 잘 살아가는 것이고 뒤처지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시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변화되어 버린 현재, 어떤 나라가 선진국이고 어떤 나라가 후진국인지 궁금하다.

코로나19는 우리 삶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삶에서 무엇을 놓치고 살았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스스로 묻게 했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온 힘을 다해 노력했던 삶의 방향성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문명화라는 이름에 감춰진 이면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명화와 그 이면에 가려진 것 사이, 선택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갈림길에 있지만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은 굉장히 역설적이다. 우리는 문명화된 삶, 풍요와 편리함,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욕구를 완전히 채울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놓고 싶지 않다.

최근 고려대학교 석영중 교수가 번역한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광인의 수기’를 읽었다. 역자는 이 두 작품을 통해 톨스토이가 이야기하려는 삶과 죽음,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문명과 문명으로 인한 부도덕의 관련성을 ‘문명화’란 표현으로 정의했다. “문명화된 인간, 문명화된 사회, 문명화된 계급이 부도덕한 것이며 대부분의 문명화된 인간이 누리고 있는 것들, 재산, 관습, 교양, 종교, 예술이 부도덕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신앙 깊은 정교회 신자였다. 그가 종교를 부도덕하다고 한 이유는 정교회의 교리와 전례는 명확하고 영적이지만 그 정교회의 신앙을 사는 이들의 삶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문명화’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함께 톨스토이는 반문명적인 것을 ‘자연화’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자연화’는 야만의 삶이 아니라 자연에 가까운 삶, 순리에 따르는 삶, 자연스러운 삶으로 해석했다. 곧 톨스토이는 이 ‘자연화’는 진실한 것이며 그래서 성스러운 것이고, 여기에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우리는 문명화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진실하고 자유로운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진정한 이타적 행위, 친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조건 없는 사랑의 행위야 말로 문명화의 이면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이타심은 문명화로 인해 잃어버린 참된 인간의 삶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 철저한 자기 포기의 삶으로 타인을 위해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면서 문명화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삶, 풍요와 편리함을 쟁취하여 가면으로 덧칠해진 거짓된 삶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7장 12절 예수의 말씀이 문명화를 향하여 달려가는 우리의 삶의 방향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