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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낮춤 그리고 제자리 찾기
2020년 04월 28일(화) 00:00
[곽 진 상지대학교 명예교수]
요즘처럼 말이 사납고 거친 때도 드물었던 것 같다. 말의 홍수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해 몸부림을 친다. 상처 주기와 편 가르는 말들이 멈출 줄 모른다. 말의 낭비이다. 침묵의 용기가 필요한 시기이다.

사람이 태어나 말을 익히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려면 그 30배의 시간이 든다고 한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듯(靜水流深, 深水無聲) 고요함 속에 참 진리가 깃든다. 침묵은 ‘밭을 갈고 씨앗을 심은 뒤에 새싹을 기다리는 것처럼’ 인내와 희망을 요구한다. 흔히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말이 적고, 말 많은 사람은 아는 게 거의 없다고도 한 것은 침묵의 경험적 실체를 이른 말이다.

중국 위(魏)나라 문후(文侯)와 전설적인 명의 편작(扁鵲)과의 문답으로 침묵의 생생한 현장을 보자. 문후가 묻는다. “그대 삼형제들은 모두 의술에 정통하다 들었다. 누가 가장 뛰어난가?” 편작이 답한다. “맏형이 으뜸이고, 둘째 형이 다음이며, 제가 가장 떨어집니다.” “그런데 왜 그대의 이름만이 세상에 높이 알려졌는가?”

“맏형은 병을 미리 알아 병의 뿌리를 제거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형은 병이 든 초기에 치료하니 환자들은 대수롭지 않은 병을 고쳤다고 여깁니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는 까닭이지요. 저는 병이 심각해진 뒤에 다스립니다. 환자들이 저의 시술을 직접 보기에 제 의술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진실로 앎이 꽉 찬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하지 않으며, 침묵 속에 오히려 참된 가치의 위대함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일화이다.

낮춤의 오묘한 의미가 담긴 말로 ‘곡신불사’(谷神不死)가 있다. ‘계곡은 어떤 경우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온 세상이 타들어 가도 마르지 않는 곳이 바로 계곡이다. 그래서 계곡은 마르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왜 그럴까?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기 때문이다. 낮은 곳을 찾는 겸손(謙遜)이 가장 오래 살아남는 생존의 이치이다. 노자가 말한 곡신(谷神)의 정신이다.

곡신의 의미는 다양하지만, 견고하고 딱딱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연약한 것이 말 뿌리이다.

‘도덕경’에서 부드럽고 겸손한 것이 굳센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계곡의 정신은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즉, 이는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라는 공자의 말씀과 상통(相通)한다. 노자가 만들려는 세상은 위압적이고 군림하는 게 아니라 부드러움과 겸손이 존재하는 계곡 같은 세계다. 강한 것이 으뜸이라는 오만한 확신이 지배하는 요즘, 부드러움과 낮춤의 정신이 그 폐해를 치유할 참다운 지혜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승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 결정된다. 낮춤과 겸손을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오래전 모 교수께서 17년간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 들풀(100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토종 들풀 종자은행’을 설립한 이야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한때 이 기사로 인터넷 공간이 뜨겁게 달궈지기도 했다. 기사의 말미에 실린 “잡초란 상황에 따라 붙여진 의미이지, 원래 잡초란 없습니다”라는 그분의 해설이 백미였다. 당시 받은 감동은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아직도 그 충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분의 말씀은 이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서는 벼가 잡초고 보리밭에서는 밀이 잡초입니다. 상황과 자리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죠.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그 귀한 산삼도 밀밭에 자란다면 영락없이 잡초라는 것이다. 제 자리가 아니면 산삼도 잡초라니 그 반전이 놀랍다.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된다는 일침이다. 17년의 긴 시간 전국 산야를 누비면서 깨달은 지혜가 이 하나뿐이었을까마는, 자리다툼에 모든 것을 거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질타하는 듯한 깨우침이 정곡을 찌른다.

사실, 타고난 남다른 자질을 세상에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보리밭에 난 밀처럼, 뽑히어 버려지는 그 삶들이 안타깝다. 그러나 그들도 자리를 가리지 못해 일시 잡초로 보였을 뿐일 것이다.

지금 이 자리가 내 제자리인가? 라는 물음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